[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 강길봉
  • 승인 2019.10.19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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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기모습을 보기 위해 세 가지 거울(mirror)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자기의 거울(self in mirror)’이다. 아침저녁, 집 안팎에서 수시로 들여다보고 자기 모습을 확인하는 거울이다.
대체로 직사광선에 차단된 욕실 화장대에서 비추어진 어제/오늘/내일의 거울속의 얼굴은 그다지 큰 변화는 없다. 거울 밖 세상사의 온갖 난리굿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절이 바뀌고 해가 두어 번 지났는데도 거울 속 자기모습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 뿐이지 늙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하는 거울이다.
우리들은 실제로 거울 속 비춰진 자기모습에 이미지화된 채로 살아가고 있다.

두 번째 거울은 ‘타자(他者)의 거울’이다. 타인의 눈에 비춰진 나의 모습을 보게 하는 거울이다.
타자의 거울로 보이는 모습은 그날그날 날씨에 따라서도 다르고 혹한기나 열대야 때면 큰 차이도 나타나고, 세월의 변화에도 시시각각으로 달라진다. 타인의 눈에 비춰진 나의 모습은 대부분 실제보다도 후(厚)하기 보단 박(薄)하다. 전철 안 칠순 노인이 그보다 젊은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거나 노인석이 아닌 일반석에 앉는 경우를 많이 본다.
타자의 거울에서 나의 모습은 타인, 환경, 세월에 시달린 보다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모습이고 나이 들어가는 그 만큼보다 더 빨리 늙어간다. 한 때 생기발랄했던 아름다운 꽃도 잎이 마르고 꽃이 시들 듯, 세월은 누구도 비껴갈 수 없다는 것을 진리로 믿게 하는 거울이다. 엊그제 학교에서 누가 내게 “강 박사님, 건강하시죠?”하고 묻기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데 그것은 아닌 것 같아요. 내 나이만큼 아파요.”라고 대답했다. 나이 육십이 넘었는데 삼사십 대처럼 쌩쌩하다고 말한다면 결례가 되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마음의 거울, 즉 조심경(照心鏡, mirror of mind or heart)이다. 마음의 눈으로 사람 사물 세상사를 바라보는 거울이다. 시간의 ‘양적 흐름’(과거->현재->미래)보다는 ‘시간의 질적 흐름(과거⇆현재⇆미래’을 가능하게 하는 거울이다. 동일한 시간대와 장소에서 함께 지냈던 이삼년 선후배를 만나면 마치 그때인 것처럼 반갑고 괜히 신나는 것은 마음의 거울 탓이다. 어느 현자(賢者)는 “사람은 겉이 늙지, 속이 늙는다냐. 절대 안 그래.” 라 하셨는데,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다.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라는 그 얘기는 나이 들어갈수록 생생하게 느껴진다.

지금으로부터 딱 80년 전 문예지 <문장>이 창간되고 제2차 대전이 터졌고 조선은 일제(日帝)에 철저하게 도륙(屠戮) 당한 시기다.
자다가 길 가다가 잡혀가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서러운 감옥살이(강제징용), 무자비한 죽임(무자비한 의병학살/도살), 그리고 순수(純粹)한 영혼을 갈갈이 찢어버리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위안부)을 자행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23세 연희전문학교 청년 윤동주는 1939년 가을에 ‘자기의 거울’이나 ‘마음의 거울‘로 그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자화상>이라는 시로 성찰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씁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자화상> 전문


우물은 태초의 물이 솟아 나오는 생명의 원천이다. 순수한 자연 그 자체이다. 중심에서부터 가장자리에 이르는 거리가 어느 각도에서나 동일한 모난 데가 없는 이상적인 공간이다.
원(圓)은 원을 제 입으로 제 꼬리를 문 채 끝없이 순환하는 원만하고 온전하며 충만한 구조라 한다. 그 속에 밝은 달과 둥실거리는 구름, 파아란 바람, 광활한 하늘, 풍성한 가을이 펼쳐진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적인 자연상태이다. 윤동주의 자화상에서 우물은 때 묻지 않는 유년시절(만주 명동이라는 동네의 우물)의 서정적인 자아이다. 명경지수(明鏡止水)라 하듯 그가 성찰할 수 있는 마음의 거울이다.

우물
우물

수줍음 많은 청년 윤동주는 마음의 성찰을 위해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는 산모퉁이 외딴 논가 우물을 홀로 찾아가서 우물 속을 응시한다.
제 빛깔과 향기를 다함없이 펼치고 있는 자연에 비해 초라하고 나약한 사나이(자아, 조선백성, 민족 혹은 나라)를 직시(直視)하게 되고 자기혐오와 부끄러움에 도망치듯 외면한다.
달아나다 ‘못나도 내 자슥이요, 내 부모인디’라는 애증(愛憎)과 연민(憐愍)으로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오고감을 반복하게 된다. 오고감의 행위와 시간의 쌓임으로 그 사나이에게 정이 듬뿍 들게 된다. 드디어 부끄러움으로 달아나고 연민으로 인해 돌아온 그 사나이는 추억(追憶)의 사나이가 된다. 추억은 부끄러울 수도 못날 수도 있지만 시간이 가면 언제나 정답고 애잔한 것이다. 추억은 외면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역사다. 윤동주는 나와 우리와 민족의 현실이 암울하고 슬프다. 하지만 때론 울고 때론 웃으며 함께 가야 할 운명공동체라고 설파하는 듯하다.

나는 부끄러울 때가 많다. 친구나 후배들에게 밥과 술을 잘 사주는 넉넉한 사람을 볼 때면 그렇다. 한 때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이 대학총장이나 멋진 교수, 국무총리나 장관, 방송국의 수장(首長)이 되고 세계적 기업의 사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 축하를 해주면서도 쓸쓸하고 부끄럽다. “나는 뭐하고 살았당가.”하는 자괴감일 게다. 그래도 못난 것 많고 뚜렷한 업적은 없지만, 두 딸이 건강한 사회인으로서 살아가고 있고, 어여쁜 손녀가 있으며, ‘나답게 라도’ 산 것에 대한 연민으로 다시 나를 추슬러 본다. 그러다가 삼대(三代)가 이어서 공부해야 쓴 제대로 된 멋진 글을 만날 때 즐거움이 있지만, 경외심과 더불어 못난 부끄러움에 다시 여지없이 무너진다. 내 인생을 마음의 거울로 비춰보면 ‘부끄러움과 연민의 도돌이표’ 같다. 마음의 거울을 추켜들고 추억(追憶)처럼 다정한 마음으로 낙엽지는 가을에 빠져 봅시다.

 

[강길봉 박사]

강길봉 박사
강길봉 박사

약력:
* 순천 태생, 순천매산고/단국대 법대(5.16 장학생)/고려대 대학원 졸(행정학석사/박사)
* 고시학원 강의(종로/노량진/신림동 24년)
* 고려대, 서울시립대, 행정안전부, 광운대 강의(외래/겸임/강의전담교수)
* 최신행정학(육서당,2000, 20판), 최신행정학(새롬, 15판) 행정학개론(21세기사,2019), 외 저서 및 논문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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