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 강길봉
  • 승인 2019.11.16 1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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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鳥)는 날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고개를 꺾고 뒤를 돌아보는 새가 있다면 그건 죽은 새다. 세월 또한 고개를 숙이고 뒤를 돌아본 적도 죽는 적조차 없다.

다만 인간만은 앞으로 걷거나 심지어 달릴 때에도 뒤를 돌아본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잠시 쉬는 것이다. 또한 지나왔던 시간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살피는 마음이다. 동물들은 과거도 미래도 모른 채 주린 배를 채우기에 온 힘을 쏟는데 비해 인간은 과거를 붙잡고 씨름을 한다.

가을비가 내리고 캠퍼스 여기저기 은행잎이 비에 젖어서 떨어지면 기약도 없이 떠난 사람들이 불현듯 그리워 쓸쓸해지는 것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과거를 담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마음이나 정신은 현재는 아주 조금, 미래에는 조금 그리고 과거에는 많이 오래 머문다. 마음은 그가 오래 머무는 과거를 숙주로 하여 그 길이와 폭을 키워갈수록 기쁨보다는 슬픔으로 가득해진다. 눈을 감고 과거에 대한 마음 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기쁨보다는 후회와 번민, 가난과 눈물, 배신과 한탄, 미안함과 어리석음과 죄스러움 등 슬픔 물감으로 가득해지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마음이 과거에 오랫동안 머무를수록 슬픔의 상처가 온몸 군데군데 박히게 된다.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비눗방울이 공중에 떠있는 순간이나 술에 약간 취해 몽롱해지는 순간 느끼는 심리상태와 흡사하다.

반면에 걱정 불안 이별과 설움으로 가득 찬 슬픔은 마음에 도랑을 치고 얼마간 흐르는 눈물과 흡사하다. 기쁨과 행복이 신기루 같은 가상(假想)의 심리상태라면 슬픔은 삶의 과정마다 맞닥뜨리는 실체이다. 기호학(記號學)을 적용해보면 기쁨을 점(. 點, dot/point)으로 표기한다면, 슬픔은 제법 길고 굵은 선(₋₋, 線, line)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는 “하나의 슬픔 방울이 열 개의 기쁨 방울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한다. 기쁨으로는 도저히 슬픔을 물러나게 할 수 없으므로 행복하려면 아니 큰 불행 없이 살고자 한다면 기쁨보다 슬픔을 용케 피하거나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현명하다.“ 했다.

나의 경우도 서른 즈음까지 마음과 생각을 더듬어보면 기쁜 순간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죄스럽고 미안함이 가득한 경우는 참 많았다. 초등학교 때 학교는 안 가고 산과 강 기재 들녘, ‘나이롱’극장을 싸돌아다녔다. 당연히 내가 몇 반인지도 내 책상 자리가 어디인지도 알 리가 없었다.

엄니는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먹고살기 바빠서 선상님께 이런 모습을 보여서 죄송하고 죄 많은 년을 봐서 자슥을 용서해달라”며 싹싹 빌었다. 분(憤)을 애써 참았던 엄니는 집에 오자마자 깨댕이를 벗긴 채로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목 놓아 울면서 너 같은 자식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듯 매질을 했다. 그렇게 무서운 엄니는 처음 봤다.

뒤돌아보면 엄니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가장 후회스러운 짓이었다. 또 한 번은 대학원 마지막 학기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쓰러져 고속버스로 시체처럼 실려와 전남대 병원서 열흘 가까이 숨만 쉬고 거의 죽어 있다가 하나님의 가호(加護)로 살아났다. 정신이 돌아온 후 보름 정도 지난 어느 날 병실에 아무도 없자, 엄니는 “서방 먼저 보낸 년인디~~ 자슥까지도 먼저 보낸 년을 맹글려고 이 문딩이 새끼야 지랄을 하냐!”고 하얀 병원 침대 위에 눈물을 뚝~뚝~ 떨구며 흐느꼈다.

부모가 준 몸댕이를 조실하게 관리하지 못했던 내가 엄니에게 지은 참으로 못된 죄였다. 생각이나 마음이 주로 과거에 머무를 땐 마음은 이처럼 후회와 회한(悔恨)과 연민으로 가득 차 행복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진다.

과거 지향적 마음가짐에서 시간의 방향 키를 미래로 돌려보자. 과거보다 미래에 마음이 향해 있다면 행복할까. 아니면 번민과 갈등이 씻어질까. 몇 년 후 아니 몇 십 년 후 어떤 성취감이나 만족감, 아니면 보다 큰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마주하게 될 소소한 만족과 기쁨을 쓰레기 창고에 쌓아놓거나 구석대기로 밀어내는 것이다.

큰돈을 갖고 큰일을 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자린고비가 되고 타인에게는 지독한 구두쇠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윤리 도덕 양심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당하지만 성실하게’ ‘진실하지는 않지만 열과 성의를 다해서’ 공정하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돈을 불리고 인맥을 쌓아 만인이 부러워하는 그 자리로 향해가는 사람도 있다.

미래나 어떤 목표를 위해 현재를 경시하면 큰 병에 걸리거나 불안과 위험에 휩싸이게 된다. 더 나아가서 공정과 진실과 정의는 개인의 성실성 앞에 무참히 짓밟히게 된다. 개인 차원을 넘어서 더러 ‘경직된 종교적 또는 정치적 신념’ 같은 ‘미래의 천국’ ‘정의롭고 공정하고 균등한 세상’을 위해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무고한 사람들을 지옥(地獄)으로 몰아넣는 뻔뻔한 역사도 드물지는 않다. 현재를 포기하면서 미래의 어떤 가치나 의미를 위해 온통 마음을 쑤셔 넣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무의미한 희생과 굴종 불안과 공포 파렴치한 인간으로의 전락 대량학살 등 ‘마음의 지옥화’를 스스로 만들 수도 있다.

천국과 지옥이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는 지위고하나 가방끈의 장단에 관계없이 이미 일반화되었다. 과거에 집착하는 마음은 회한과 연민을 가득 차게 하고 미래에 마음을 지나치게 둔다면 희생과 억울함 불안 공포를 증폭시킨다.

그러면 마음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는 마음은 어두운 심리적 상황을 조성해서 ‘지금 현재 여기의 (I, myself as here and this moment just now)를 매몰시키거나 가리게(hide or conceal)할 수 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살아있고 살아가는 것이 “지금 여기 이 순간이 그냥 참~좋다“라는 단순 명료한 상황을 자주 접해야 한다. 회환 가득 찬 과거나 무자비한 희생과 불안감이 큰 미래라는 생각감옥(심리적 상황)에서 가능한 벗어나 있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

타자의 눈에 비춰진 착한 나를 만들기 위해 마음을 쓰는 것이나 과거의 착한 체했던 우연적인 행동을 현재 지금 싫어도 하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기 기만이다.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원하는 나 자체와 과거와 미래의 심리적 상황에 싸여있는 나는 다를 수 있다.

새소리가 없는 적막한 산, 각종 채소나 과실이 없는 텃밭, 눈만 쌓였다가 햇볕에 덩그러니 드러난 겨울의 텅 빈 논과 밭 ’마하‘ 전투 비행기나 각종 나는 짐승이 없는 고요한 하늘, 소음과 경적소리 없는 조용한 마을, 이른 아침 새벽 기도를 드리는 어느 신도, 혼자 고요히 동안거에 빠져있는 스님, 마음이 가난한 자 등을 떠올려보면 ’나 자체(I, myself)‘와 ’과거와 미래라는 심리적 상황 껍데기에 둘러싸여 숨도 못 쉬고 우는 나’와는 다르다. ‘지금 현재 여기의 나, 그 자체(I, myself as here and this moment just now)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현재가 무엇보다도 부각되고 현재로부터 전개되는 과거, 현재의 단순한 연결선 상이나 현재의 자연스런 축적물로서 ’있어야 할‘ 강요된 압박적인 미래가 아닌 ’있으면 좋은‘ 자연스러운 미래가 되어야 한다.

심리학에서는 의식(consciousness)을 마음이나 정신과 다소간의 차이를 두고 개념화하고 있다. 정신과 마음이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을 숙주로 확장해 가는데 비해 의식은 ‘지금 현재 여기’에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작용이다. 수술 후 마취에서 막 깨어난 환자에 대해 담당 의사가 “의식은 깨어났으나 아직은 정신이 온전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보호자에게 말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든 그렇지 않든 심리적 상황은 나 자체, 즉 본체는 다르다.

나의 행복과 평화를 심리적 상황으로 혼동하여 슬픔과 분노에 빠지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담은 시가 있다. 진리나 교훈을 오랜 수행자로서 삶을 체험하고 삶의 질에 대한 깨우침을 다루는 것이 잠언시(箴言詩)이다. 우리나라에서 잠언시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은 구도자이자 명상가인 류시화(1957~) 시인이다. 자연이나 사람 그 자체의 본체가 그리워하는 류 시인의 시는 다음과 같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시집(1991)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 있는 게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에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시인의 곁을 떠나 ‘대중에게 날려버린 시(발표)’는 시인의 개인 소유물이 아닌 공유재이다. 물과 공기도 공공재에서 이미 오랫동안 공유재가 된 지 오래다. 시를 애호하는 마음의 눈으로 해석을 하고자 한다. 이 시는 세상의 온갖 미혹으로부터 본체를 에워싸고 있는 휘황한 빛깔과 요상한 향기를 지닌 그대보다는 착하고 물정에 어두워 가난한 그대 본체가 그립다. 심리적 상황감옥에 갇혀 울고 있는 그대보다 꽃을 보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하게 웃었던 ‘원래 그대로(as it is)’ 원래 그대로의 당신을 만나 은밀하게 나의 속 이야기를 하는 게 진정한 바람이라는 메시지다.

신은 자연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인간들이 편리성을 위해 만든 도시로 인해 하늘이나 강 바다는 온갖 것들로부터 더럽혀지고 본체를 잃어버렸다. 마음이 가난하고 선한 그대 본 모습이 그립듯 원래 그대로의 하늘과 강이나 바다가 그립다. 그러므로 원래 그대로의 바다와 강 하늘 가난하고 착한 그대를 위해서 애써야만 우리들도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메시지다.

또 류시화 시인은 ‘남의 눈귀가 무서워’, ‘실패할까 두려워서’, ‘돈 때문에 일을 한다는 비난이 두려워’ ‘나중에 또다시 기회가 오겠지 하는 바보 천치 같은 마음’을 과감하게 버리고 오늘 지금 여기에 마음을 다 해라고 다음 시에서 말한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는 것처럼>

류시화 역(譯)음 시집(2005)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는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는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는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마음이 어지럽고 심란할 때, 분명코 타자에게 상처나 죄가 되지 않지만 무엇인가 머뭇거리면서 사는 게 재미가 없을 때, 나를 에워싸고 있는 심리적 상황 감옥을 벗어나서 지금 당장 재미를 느끼는 시간을 영위하시길 빈다. 나 또한 논리를 넘어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모두 행복한 시간 길 되시길 빕니다.

2019.11.16.8:10 강길봉 드림


[강길봉 박사]

강길봉 박사
강길봉 박사

약력:
* 순천 태생, 순천매산고/단국대 법대(5.16 장학생)/고려대 대학원 졸(행정학석사/박사)
* 고시학원 강의(종로/노량진/신림동 24년)
* 고려대, 서울시립대, 행정안전부, 광운대 강의(외래/겸임/강의전담교수)
* 최신행정학(육서당,2000, 20판), 최신행정학(새롬, 15판) 행정학개론(21세기사,2019), 외 저서 및 논문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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