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 강길봉
  • 승인 2019.11.30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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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을 졸업한 스무 살 후반, 노동 분야 연구원으로 반 년 있다가 이게 아니다 싶어 그만 뒀다. 먹고 사는 게 급선무라 고시학원 문을 두드렸고, 운 좋게 기회를 얻었다.

처음엔 조직론, 인사관리 분야를 담당했다. 일주일 네 시간 강의를 위해 주말 이틀을 제외하고 거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강의준비를 했다. 칠월 초 시작한 강의를 두 바퀴 돌고 11월 개강 때, 수강생들로 강의실은 넘쳤다. 1986년 초, 전공인 행정학을 이삼년 동안 강의하고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일타강사’가 되었다.

그 후 마흔 초반까지 개강 때마다 순천 아랫장날처럼 수강생은 붐볐다. 학원이나 회사는 수강인원수나 매출액을 돈으로 환산한 값으로 조직의 성공과 실패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강사들의 처우 또한 수강인원수 등 성과(결과)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다가 보다 더 현재적 성과를 중시한 국내 중견기업이 학원조직을 인수하면서 오래 된 사람부터 감원대상이 되었다. 조직에의 경험/역사나 추억 따위는 버릴 헝겊에 지나지 않았다. 조직의 쓴맛을 입에 느끼며 스무 해 넘게 지냈던 곳을 떠났다.

전쟁터 같은 조직에서 벗어나서 서른 중반에 딴 박사학위를 무기삼아 서울시립대 등 대학으로 강의 터전을 옮겼고 주당 12~18시간 강의를 했고 여름겨울 방학 땐 무려 넉 달 동안 쉬었다. 토요일 일요일이 바빴던 기존 생활과 달라 한가롭고 즐거웠다.

그러던 중 집 근처 불암산 자락 텃밭을 얻어 가꾸고 흙을 만지작거리면서 세상사에 대한 이런저런 욕심과 애증(愛憎)을 풀 수 있었고 마음이 행복했다. 텃밭은 식구들이 먹을 채소라 요소비료와 퇴비 위주로 가꾸고 야채 고유의 맛과 향기를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농약이나 살충제를 쓰지 않았고 벌레는 직접 잡았다. 시중에 대량 판매되는 야채들이 얼마나 많은 살충제와 농약을 쓰는 지도 알게 되었다. 직사광선인 햇빛이 차단된 비닐하우스 온상의 야채는 빛깔은 좋고 부드럽지만 향기가 없고, 여러 번 농약을 쳐야만 되는 고추 배추 등은 빛깔은 좋으나 연하지 않고 향기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상추가 왜 채소 중 왕이라 상채(上菜)라고 하는지도 알았다. 비닐하우스 상추는 부드럽지만 향기가 없고 그냥 ‘풀이파리‘다. 텃밭 상추는 벌레가 달라들지를 않고 향기도 있고 부드럽다. 비닐하우스 상추가 이삼 일이면 썩는데 텃밭 상추는 신문지에 잘 싸서 간직하면 보름 이상 유지가 가능하다.

유독 농약을 많이 하는 경상도 할머니와 노부부에게 “아니 식구들 먹을 야채에 그렇게 여러 번 약을 쳐대면 어떡하냐?”고 물었더니 빛깔 좋고 벌레 먹은 흔적이 없어야 비싸게 팔 릴 수 있다고 했다. 회사나 학원처럼 야채시장도 성과(결과)로 성패가 좌우되는 세상이 된 지 오래다. 값 비싼 야채는 야채를 키우는 과정에서 햇빛과 햇볕, 애정과 정성보다 필요한 만큼의 농약과 비닐하우스에서 만들어진 빛깔 좋고 흠 없는 것이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식 중 공부에 그다지 흥미를 갖지 못한 자녀가 어느 날 공부한다고 밤도 지새우고 주말 이틀은 도시락 싸매고 독서실에 갔다 밤늦게 귀가했다. 시험 결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겨우 열여섯 밖에 되지 않는 자녀에게 세상 다 산 녀석처럼 “너는 공부와는 담을 쌓는 게 좋겠구나.” 라든지, “앞으로 공부 외에 다른 길을 찾아봐라.”든지 하는 것은 결과 중심주의이다.”공부에 흥미를 갖지 않았던 네가 뭔가를 마음잡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네가 대견스럽고 고맙다.“고 했다면 그것은 과정을 중시여기는 생활방식이다. 어떤 대화가 바람직할까. 동급생들과의 떠들썩하게 웃고 장난치며 얘기하는 과정이 없이 혼자 인터넷 강의나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과 며칠 동안 생활하거나 농담이나 대화를 오래 한 적이 있는가. 사람관계에서 유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방어적이고 자기 확신이 강해 상대의 주장이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 인터넷 교육 검정고시 독학은 제도권 교육에서 자의반타의반으로 비껴간 사람들에 대한 가외(加外的)의 교육방식이다.

여러 대학교의 부설 교육원에서 5학기 만에 4년제 대학 졸업장을 취득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것 또한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교육과정과는 다소의 거리가 있다. 동일한 대학의 졸업장이라고 그것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과정을 무시한 결과주의이다. ‘자본주의에 교육의 평균화라는 탈을 씌운’것에 불과하다. ‘독을 해독하는 독’은 필요악이다. 특수/예외적인(special and unusual)인 것이 보편적이고(universal) 것을 정당화한다면 그것은 혼란이다. 6년 3년 3년 4년 아니면 또 2-3년 4년 더 공부한 지루한 그 과정을 한걸음 또 한걸음 거북이처럼 걸어갔던 사람과 그렇지 않고 건너뛰거나 우회한 사람이 현재 사회적 지위나 재산이 비슷하다면 두 사람을 동일하게 볼 것인가. 현재적 결과를 중시하는 자본주의 시각에서는 양자를 동일하게 인식하지만 건강한 사회에서는 전자를 더 훌륭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고교졸업생 수의 급감과 서울/수도권 쏠림현상으로 인해 지방대학이 취업기지로 전락해가는 모습도 결과만을 최우선시하는 자본주의의 ‘이면(裏面)’아닐까.

서울의 명문대학에 보내기 위해 먹을 거 입을 거 아끼면서 자식 뒷바라지를 했는데 부모의 기대치에 맞는 대학에 자식이 가지 못했다. 결과가 나쁘게 나왔으니 부모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 다른 각도에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서울 명문대 입학했다고 그 부모들만 교육에 대한 올바른 정신과 애정을 갖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이다. 자식이 공부를 잘한가 여부나 럭비공이 어느 방향으로 튈 것인가는 한두 가지 요인으로 알 수 없는 일인데도 말이다. 이 또한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할 수 없는데도 이상하게 명문대를 간 부모에게 자녀 교육을 어떻게 했냐고 묻는다. 부모들이 정답을 알 리가 없다. 교육의 성과는 학생의 몫에 대부분 좌우되기 때문이다. 부모는 단지 조력자일 뿐이다.

로울즈(J.Rawls)는 정의론(正義論)에서 부동산 투기는 집값을 치솟게 하고 ”집이 진정 필요한 다수 서민들의 보금자리를 빼앗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부동산 투기로 돈 벌이를 하는 것은 범법자(犯法者)나 다름없다.“ 했다. 그러한 신념에서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는 양심 있는 시민들도 많다.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경매 나온 물건을 열나게 사들이고 갭 투자를 해서 많은 돈을 번 사람들을 귀재라고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바보라고 한다면 이것이 정상적인 평가일까. 나 또한 사람들이 얘기하는 곳에 두 세 채 집 살 돈이 있었어도 공기 좋은 변두리 산 밑만 고집해서 영양가가 없는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이라고 집사람에게 비난을 받는다. 이것도 결과에 의해 과정상의 정의(正義)는 쓰레기로 전락한 셈이다. 문체부 국장 지내고 퇴직한 친구 얘기가 ”잠실 서른 평 아파트에서 나란히 동생과 살다 20년 전 용인 50평 아파트로 이사했다. 지금 동생 집은 자기 집보다 아홉 배가 비싸다.“고 이게 자기가 정말 잘못한 것이냐고 체념하듯 말하더란다. 형이 정말 바보인가. 반대로 동생이 현명하고 정당한 선택을 한 삶을 살고 있는가이다.

국내 대기업에 취업해서 5년 내 스스로 퇴사하는 사원이 네 명 중 하나라고 한다. 연봉과 사회적 이미지 등 성과/결과에서 최고여서 그 회사를 선택했다 한다. 그러나 내가 무슨 일을 할 때 재미와 행복을 느끼는지, 인간관계에서 나는 물론 나 때문에 상대방도 실제로 행복한지, 상사에게 귀염 받고 부하에게 너그러운 마음 자세는 갖추었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소홀했기에 적응할 수 없었단다. 옛날 같으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참고 견디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은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리면 그만 둔다고 한다.

인생이라는 시간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함께 걸어가는 사람과의 추억을 쌓아가는 일이다. 나와 추억이 아롱아롱 맺혔을 때 살아갈수록 좋아서 그립고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에 아쉬움이 많아진다. 함께 웃고 함께 울었던 혈육 친구 등 좋아하는 사람이 TV나 신문에 오르내리는 미인미녀보다 훨~씬 가치가 있고 눈물겹도록 좋다. 그것은 좋아하는 사람과의 ‘추억 만들기’라는 삶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유명 스타’가 죽었을 때 아쉬움은 있지만 목메이게 울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결별은 애가 타도록 보고 싶고 눈물이 난다.

살면서 성과(결과)와 과정(절차) 중 무엇이 더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인식과 행동양식은 건강한 사회인가의 여부를 가름하는 중요한 지표이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문제가 단지 언어나 논리적 유희에 불과한 것이라면 결과와 과정의 인식전환은 수많은 생명들의 생사와 직결된다. 더 늦기 전에 나와 우리들이 곰곰이 생각하고 차분하게 실천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삶의 명징한 결과는 죽음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시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과정을 즐기고 의미 있게 시간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감히 건방지게 단언해 본다. 영화 <아메리칸 컬트>는 삶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삶을 하나의 무늬로 바라보라

행복과 불행은 다른 세세한 사건들과 섞여들어

정교한 무늬를 이루고 시련도

그 무늬를 더해주는 색깔이 된다.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그 무늬의 완성을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삶은 과정이고 행복과 불행 시련들을 세세한 시간에 따라 겪고 각각의 향기와 색깔로 채색되다 마지막 순간 독특한 그만의 무늬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대사다.

이슬람 국가 사람 잘랄루딘 루미의 <여인숙>이라는 시(詩)도 삶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는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들을 모두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어서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고 해도 각각이 손님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중인 줄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으라

그리고 그들을 집 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잘랄루딘 루미의 <여인숙> 전문


이슬람 문화권의 시인은 개개인의 인생을 여인숙으로 의인화했다. 여인숙(인생)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온갖 모양의 손님/방문객(기쁨, 절망, 난폭한 행동, 슬픔, 슬픈 군중)을 세세한 순간마다 환영하고 맞아들인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이 무너지고 심각한 혼란 상태에 빠지더라도 그 과정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말하고 있다.

삶이란 끊임없이 다양한 세상 가치를 기쁘고 맞이하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며 깨달음의 과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11월 마지막 날이다. 몸과 마음 건강 잘 챙기시고 12월엔 더욱 행복하시길 빕니다.

2019.11.30.9:00 강길봉 드림


강길봉 박사

강길봉 박사
강길봉 박사

약력:
* 순천 태생, 순천매산고/단국대 법대(5.16 장학생)/고려대 대학원 졸(행정학석사/박사)
* 고시학원 강의(종로/노량진/신림동 24년)
* 고려대, 서울시립대, 행정안전부, 광운대 강의(외래/겸임/강의전담교수)
* 최신행정학(육서당,2000, 20판), 최신행정학(새롬, 15판) 행정학개론(21세기사,2019), 외 저서 및 논문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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