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 강길봉
  • 승인 2019.12.21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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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잊혀지지 않는 아니 잊을 수 없는 스승이 한 분 계셨다. 그분은 내 나이 삼십 중반 박사과정 때 만났다. 지도교수보다 더 친하게 지냈고 친구처럼 때론 인생을 달관한 철인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박사과정 중 3학기 동안 그분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한국의 행정문화, 행정행태론 등의 강의였던 것 같고 정치철학에 정통한 듯했다. 방학 중이나 학기 중 시간을 서로 맞춰서 일 년에 서너 번은 강원도 홍천군 내면과 남면 가평 이곳저곳 강물을 들썩거리며 천렵을 함께 다니기도 했다. 어느 땐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민통선 부근까지 가기도 했고, 스무 해 가까이 다녔다. 시중에선 여간해선 먹을 수 없는 튀김, 소가리회나 누치회, 잡어가 섞이지 않는 꺽지탕이나 빠가사리탕, 일류 요리사 버금가는 민물고기 조림까지 먹을 수 있었다. 강의도 유익했지만 스승과 함께 한 시간들은 삼십 중후반에서 오십 중반까지 그야말로 신선놀음이었고 가장 신나고 행복한 시간 중 하나였다. ‘충청도 아줌마’ ‘홍도야 울지 마라’를 무척 좋아하고 신나게 부르시기도 했다.

그러다가 박사과정이 끝나고 어느 날 횟집에서 지나가는 듯 여쭈어보았다. “선생님, 인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랬더니 “인생은 그가 생각한 그만큼 만이다.”라는 대답을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했다. 항상 답이 없는 질문에 괴로워해 왔는데 그 말에 “나는 뽕~~갔다.”

그 후에도 이런저런 일로 사는 게 힘들고 뭔가 풀리지 않는 문제를 갖고 끙끙 앓을 때, 내가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아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농담 속에 밀어(密語)처럼 답을 넌지시 던지셨다. 스승과 함께한 이십여 년 동안은 ‘인생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애를 태우지 않아도 되었다. 그분은 2012년 가을 학기가 시작되는 즈음 하늘나라로 가셨고 나는 엄니를 보내고 6개월 후 다시 스승을 잃고 정신적 고아가 되었다.

해가 바뀌는 연말 즈음이면 산다는 것이 자욱한 안개 속으로 걸어가는 듯하다. 삼십 이전에는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살았고 또 다른 삼십 년은 살기 위해서 돈을 세면서 보냈다. 육십이 넘은 지금 먹고사는 먹이사슬에서 벗어나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 종달새처럼 자유롭기도 하고 이제 곧 어미 새가 있는 둥지를 떠나기 위해 나는 연습을 끝낸 새처럼 막막(漠漠, boundless or extensive)하기도 한다. 돈을 세고 셈에 밝았던 먹이사슬에서 벗어나 저 하늘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누구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평화롭게 날 수 있을까. 속절없는 시간이 흐름 속에서 농담 속에 밀어(密語)처럼 답을 넌지시 던지시던 옛 스승을 만나고 싶다. 이럴 때 불쑥 나타나서 "강박! 오늘 대문 잠그고 개 풀고 밤새 마지막 날처럼 놀아보자."고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입이 찢어질 듯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릴 것 같다.

내 스승은 419세대다. 1960.4.19. 전후 당시 20대의 나이든 고등학생과 대학생들, 60년대 학번, 1940년대 출생을 소위 419세대, 숫자로 ‘264’세대(지금은 764 혹은 864세대)이다. 이들은 유아기 때 해방을 맞이했으니 해방둥이에 해당한다. 초등학교 때 육이오 전쟁을 겪고 살아났고, 중고등학교 때 ‘사회 안정과 질서’의 미명(美名) 아래 반공(反共)지상주의의 ‘자유가 없는 자유당 정권’을 겪었다.

온갖 비리와 부정과 집권야욕에 골몰한 공작(工作)과 협작(挾作) 정치를 거부하고 인권과 자유를 위해 혁명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홍색(鮮紅色) 피를 흘린 세대이다. 빵도 좋지만 정의로운 질서와 비둘기처럼 하늘을 날을 수 있는 자유를 달라고 절규(絶叫)했던, 1960.4.19. 혁명을 주도한 세력이다. 혁명의 대업을 감당할 수 있다는 허황된 자신감의 장면 내각(內閣)이 등장했다.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무능함과 주저함의 제2공화국은 정치적 야심에 불타던 군부 엘리트의 먹잇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결국 1961.5.16. 쿠데타는 성공적으로 전척되었고 쿠데타는 혁명으로 미화(美化)되었다. 그 후 열여덟 해의 길고도 긴 암울(暗鬱)한 군사정권은 그들이 혼신을 다해 이룩한 경부고속도로처럼 빠르고 일사분란하게 전개되었다.

419혁명 세대 중 몇몇은 감방을 들락거렸고 대부분은 혁명이 두려운 세대가 되어 영혼을 박제 당한 채, 소시민으로 전락(轉落)해 갔다. 그들은 오직 살기 위해서 현실이라는 그 ‘징 하디 징한’ 늪으로 점차 빠져들어 갔다. 이제 그들의 맑아서 더욱 붉었던 피는 식어갔고 지금은 관망 중(觀望 中)이다.

419혁명 세대로서 현재까지 시 소설 분야에 하나의 획을 그으신 분들이 많다. 그들 중 당시 서울대 미학과의 김지하 시인, 불문과의 김승옥 소설가, 그리고 독문과의 김광규 교수이자 시인을 나는 좋아한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내 스승 공기두 선생님도 유명세는 다소 낮을 수 있지만, 시대에 대한 한(恨)과 정(情) 필력(筆力)에서는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이번 주 토요 시는 419세대의 한복판에 서서 시간 길을 걸어온 김 광규(1941~현재) 교수이자 시인의 시(詩)를 소개한다.


4·19가 나던 해 세밑 /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열띤 토론을 벌였다 /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 밤 하늘로 올라가 /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고 갔고 /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 돌돌 말은 달력을 신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 온 곳 / 우리의 옛 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 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 문학과 지성사,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전문


시가 시인들의 굴레에서 머물고 독자들에게는 거리가 먼 닿을 수 없는 ‘외딴 섬‘처럼 인식될 때가 많다. 편운 조병화 시인처럼 김광규 시인도 구체적 사실적이고 서사적(이야기) 시로 대중에게 성큼 다가왔다. 우회적이고 묵시적인 숨바꼭질 형 혹은 보물찾기 형 시에서 벗어나 보고만지고 말랑말랑한 질감을 피부로 느끼게 시를 썼다. 일부 시인들 사이에서 “이게 시인가“ 하고 의문표를 달았지만, 시가 제대로 꽃 피울 지평(地坪)을 넓혔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소개한 시가 너무 길어서 임의적으로 네 문단으로 나눴다. 시간은 1960. 4.19 즈음과 그로부터 군사독재가 전개된 18년 후를 대비(對比, contrast)시켰다. 이다. 공간은 1960년 당시 혜화동과 둥숭동 서울대학교 캠퍼스와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이다. 18이라는 숫자는 박정희 정부의 통치기간을 지칭하기도 하고 또 다른 비하적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제 1연은 4.19 혁명이 있던 1960년 저무는 즈음이다. 차갑고 혹독한 현실(혜화동 로우터리 불도 없는 차가운 방)도 아랑곳하지 않고 값싼 막걸리를 마시면서도 사랑과 국가를 위해 열띤 토론을 밤새 했다. 기성세대 누구도 관심도 흉내조차도 낼 수 없는 순수한 가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불태운 아름다운 시기이다.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에서 옛사랑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제 2연은 혁명이 두렵고 살기 위해서 사는 그들의 현재적 삶에 대한 애기다. 순수한 가치와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과는 너무나 먼 현실의 안정과 반추가 갖는 편안함과 안락함으로 혁명을 두려워하는 ‘배부른 돼지’(월급 회비 물가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에 근접한 생활이다. 즉 소시민적인 삶(넥타이 처자식 떠도는 이야기, 포커와 춤 등)에 안주(安住)하는 4.19 이후 18년 후의 그들이 모습이다.

제 3연의 장소는 옛사랑의 노래를 부르던 혜화동과 지금의 대학로로의 회귀이다. 그리운 추억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며(돌돌 말은 달력 소중히 여김, 피 흘린 곳 등) 돌아온 혜화동엔 인문사회관 캠퍼스도 없고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다. 그러나 사람들과는 달리 스무 해가 넘는 세월의 흐름과 무관하게 자연(플라타너스 가로수,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옛사랑을 간직하고 지키고 있었다.

제 4연 자연의 변하지 않는 모습에서 스무 해 만에 철저하게 변해버리고 노래를 부르지 않고 사랑도 열정도 없이 전락한 모습의 자하상을 한 없이 부끄럽고 창피하게 인식하고 반성한다. 그러나 하루하루 일상이 주는 편안함과 편리함으로 점철된 현실이라는 늪에서 나올 수도 없다. 늪이란 허우적대거나 발버둥 칠수록 더욱더 빨리 가라앉지 않는가.

결국 한 때는 순수한 가치를 위해 노래다운 노래(사랑과 사회정의, 나라사랑)를 열정을 다해 불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후 열정과 노래를 잃어버린(별똥별) 소시민적 삶에 안주하는 모습을 자괴(自愧)적으로 꼬집고 겸허하게 반성하는 시라 생각된다. 우리들이 삶을 위해 순수하게 노래 부르던 때는 언제이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옛사랑의 노래를 혹 까맣게 잊지는 아니 했는가.

나는 한국의 사회정치사에서 4.19 세대(264세대)의 사랑노래(옛사랑)는 386세대(지금 586세대)의 몫으로 바톤패스(baton pass)되었다고 본다. 최근 일이 년 사이에 전개되는 한국의 사회정치현상을 보면 자못 긴장감을 떨칠 수가 없다. 지금 일흔에서 여든 언덕 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4.19세대는 그들의 옛사랑의 노래가 다시 희미해지고 본체 아닌 그림자로 전락되는가를 안타깝게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다소간의 미소가 번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망상(妄想)일까.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하루가 되시길 빈다.

2019.12.21. 8:10 강길봉 드림


강길봉

강길봉 박사
강길봉 박사

약력:
* 순천 태생, 순천매산고/단국대 법대(5.16 장학생)/고려대 대학원 졸(행정학석사/박사)
* 고시학원 강의(종로/노량진/신림동 24년)
* 고려대, 서울시립대, 행정안전부, 광운대 강의(외래/겸임/강의전담교수)
* 최신행정학(육서당,2000, 20판), 최신행정학(새롬, 15판) 행정학개론(21세기사,2019), 외 저서 및 논문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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