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 강길봉
  • 승인 2020.01.11 11: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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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추억에 기대어 영그는가 (#1)

예나 이제나 매달 2와 7자가 들어가는 날엔 순천 큰장(場)이 열린다. 1960년대 초반, 그 당시 장대다리(순천교)가 시작되는 지점에서는 두세 개 방앗간이 있다. 거기서부터 다리건너 양 옆으로 장대낚시점과 간호학원 칠성사이다 대리점, 장천동 삼거리(당시 풍덕 지하교 없었음)에서 다시 남문파출소가 있는 순고 오거리로 이어지는 도로 양 옆으로 場이 섰다. 철교(鐵橋) 지나 기재 철도건널목(지금, 지하차도) 쪽 철길 밑, 지금 공용버스터미널 입구에 ‘나이롱극장’이 있었다. 철도건널목을 지나자마자 얕은 언덕배기에 앉아서 나이롱극장의 공연을 볼 수가 있었다. 그 뒤쪽에 대나무나 플라스틱으로 된 통전 , 옷전, 생선전, 국수 뽑는 가게도 있었다. 그 외에도 성가롤로병원 뒤편에서 지금 정원약국이 있는 곳까지는 나무 시장, 나무전이 있다. 그리고 풍덕다리에서 약간 높은 언덕에 있는 기재 철길 건널목 쪽으로 백여 미터 걸어가면 풍년 초를 파는 담뱃가게, 가게를 끼고 수십 그루의 대나무 숲이 있고 그 뒤편에 소전((牛시장) 이 있다. 그 때의 소전은 지금 아랫장의 중심부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옛날 아랫장은 지금과는 달리 소전, 옷전, 통전, 생선전, 옹구전(터미널 건너편), 채소과일/닭/오리전(장대다리-순고오거리 길 양옆), 나무전,나이롱극장 으로 구성되었고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

70년대 순천아랫장
70년대 순천아랫장 (출처:전남 소상공인 상생 협동조합 블로그)

1962~3년 경, 엄니는 순천고등학교 교사신축공사 현장에서 상인제동 친구 엄니들과 벽돌 날라다 옮기는 일을 했다. 공사가 마무리 되면서 일감이 없었다. 얼마 후 아랫장이 열리는 날이면 생선을 떼다 팔았다. 장날 새벽 여수역서 순천역 화물로 생선궤짝이 들어오면 그것을 리어커나 지게꾼들이 실어다 장에 옮기면 동네 친구엄니들 몇이 나눠서 팔았다. 장사를 하면서 서로 친해서인지 여름 장마나 추운 겨울날이면 아버지 없는 우리 집에 모여서 민화투를 친다. 울 엄니는 천성적으로 술을 못 드시지만 엄니 친구들은 가끔 막걸리 한 되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심부름 갔다가 가끔은 중간에서 한두 모금하기도 하지만 착실하게 점방에서 주전자로 술을 받아와서 부엌에서 김치와 젓가락까지 가져다  화투판에 갖다드린다. 끗발이 올라 돈을 따는 엄니친구가 “요놈 봐라. 싸가지가 있네.” 하고 머리를 만져주면서 구리돈 일원(십환)을 주기도 했다. 그 재미로 장마가 길어지거나 추운 겨울날 엄니가 혼자 집에 있을 땐  “엄니 오늘 같은 날, 삼룡이 기석이 충곤이 엄니랑 화투 안 친가.”하고 돈 욕심에 엄니를 부축이기도 했다. 당시 구리돈 일원이면 눈깔 사탕 세 개, 꽈배기 서너 개, 아니면 붕어빵 다섯 개를 사먹을 수 있었다.

 나는 엄니와 엄니 친구들이 화투를 치고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는 그런 날 돈도 돈이지만 유행가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들었던 맨 처음 유행가는 가수 남인수의  ‘무너진 사랑탑‘이다.

“♬♫♪반짝이는 별빛 아래 소근 소근 소근대는 그날 밤 천년을 두고 변치말자고 댕기 풀어 맹세한 님아 사나이 목숨 걸고 바친 순정 모질게도 밟아 놓고 그대는 지금 어디 단꿈을 꾸고 있나 야속한 님아 무너진 사랑 탑아 ♬♫♪♩~~생략~~이다.

엄니도 그 노래를 좋아해서 사무치게 따라 불렀다. 그러다가 울면 “아이고 아작도 서방을 못 잊었는가.”하고 친구엄니들이 혀를 ‘쯧쯧’차면, “아이고 그 웬수같은 문등이 나가 뭐가 보고잡당가. 그 문등이 생각나면 눈구멍을 파뿌러야지......”하면서 또 운다.
어느 날인가 그날은 추운 겨울로 기억된다. 또 엄니 포함해서 네 분이 화투를 치다 재미가 없는 지 이런저런 애기를 나누다 막걸리 한 되 받아와서 한 잔씩 드시고 차례대로 노래 한자리씩 뽑기로 했다. 그때 엄니가 부른 노래는 가수 남인수의 ’청춘고백‘이다.

”♬♫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몹쓸 것 이내 심사 믿는다 믿어라
변치말자 누가 먼저 말했던가 아 생각하면 생각사록 죄 많은 내 청춘 ♫♪♩
~생략~`이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배운 노래는 교가 외엔 기억에 없지만, 엄니 친구들이 불렀던 ’무너진 사랑탑‘과 ’청충고백‘은 항상 입에 달고 살았다. 엄니 칠순잔치를 순천로얄관광호텔서 엄니 일가친척과 친지를 모두 모셔서 엄니 ’폼나게‘해드렸다. 그때 주인공인 엄니가 부른 노래가 ’청춘고백‘이요, 그냥 매너상 재청을 했더니 ’무너진 사랑탑‘을 부르셨다.  내가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우리 엄니는 서른한 살부터 오십 여 년 동안 외롭고 힘들고 남이 내 맘 같지 않아 속상할 때, 또한 쎄가 빠지게 일을 해도 새끼들 먹여 살릴 일이 막막할 때마다 이 노래를 붙잡고 살았던 것 같다. 육십을 넘긴 나도 엄니 생각이 나면 이 노래를 은연중 부르고 있다. 노래는 그 사람의 모질고도 핍진한 인생을 속으로 삭혀주는 생명수나 숨구멍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순천 남초등 1학년을 마치고 이듬해 설 지나고 어느 날, 짐꾼 아저씨가 끄는 구루마를 따라 순고 뒤 상인제동 골짜기를 내려와 순고 뒷길->성신원↷남파->굵은 자갈이 깔린 신작로에 들어섰다. 다시 기재 철길 건널목을 넘고 소전(우시장)이 있는 대나무 숲을 지나 백 미터 쯤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풍덕다리였다. 매섭고도 세찬 바람이 귀때기를 찢을 듯이 불었다. 다리를 지나니 내리막길, 그리고 순천역전이다.


 내 나이 열 살 무렵인 1966년 순천역 풍경을 떠올려본다. 순천역 출입문에서 2-30미터 앞에는 키 작은 나무가 듬성듬성 하고 가상으로 잔디와 잡초가 심어져있는 동그란 원형의 작은 공원이 있었다. 그 공원을 끼고 왼쪽엔 합승정류장, 큰 관광안내판 뒤편에 철조망이 있고 그 안에 홍익회 대한통운, 그리고 일차선 대로변으로 정문이 있는 여객사무실이다. 역전파출소와 역 대합실 사이에 축구를 할 만큼 큰 빈터가 있고 공원과 맞보고 철도청 건물이 있다. 철도청 정원에는 상(上))인제동에서는 볼 수 없는 금붕어와 잉어들이 노는 연못, 수 만개의 고급스런 자갈이 깔려있고 수 백 그루의 멋진 나무들이 있었다.

80년대 순천역 광장
80년대 순천역 광장 (출처:전남 소상공인 상생 협동조합 블로그)

 당시 차가 다닐 수 있는 길로 보면 순천역전은 삼거리다. 여수방향, 풍덕다리 방향, 장대다리/죽도봉 방향으로 가는 길이 전부다. 삼거리 중심부분 전체가 역전저자거리다. 순천역에서 보면 일차선 도로 너머는 모두 역전시장인 셈이다. 당시 여객사무실 정면  길 건너가 지금의 성대약국이다. 약국 옆 지금 2층 커피숍 자리 뒤편에 우체국이 있었다. 우체국 앞길에서 제법 큰 연못을 끼고 안으로 더 들어가면 경전여관이 있었다. 지금 순천역광장에서 역전시장으로 가는 진입로에 대궐집처럼 몇 개의 안채까지 갖춘 제법 그럴 듯한 경전여관이 있었다. 그곳이 영화배우 박노식 씨의 처갓집이다. 그 유명한 배우를 어릴 때 두 번 정도 봤다. 키도 크고 코도 크고 눈이 부리부리하게 생겨서 영화배우가 되려면 저 정도는 생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영화배우에 대한 꿈은 그냥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 경전여관에서 연못 건너편 경전식당이 있다. 그집 큰딸이 ‘미스 전남’(후보?)이 되어 그때 동네경사가 났다. 그 ‘미스 전남’의 남동생이 매고 후배인 김금불이다. 경전여관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벽돌공장이 있다. 우체국 골목 입구에는 어느 날 야반도주하고 지금까지도 만난 적이 없는 잘 생긴 친구 집이 있다. 그 옆으로 순천역을 맞보고 일차선 도로를 따라 매고 25회 서울대 가정학과에 간(?) 김 선배의 아이스깨끼(ice cake)집, 서너 개의 과자가게와 과일가게가 있었다. 역전파출소 일차선 도로 건너편은 당시 드물게 2층 목조건물로 된 부자집이 있었다. 그 집은 잘 생기고 점잖은 매고 형빈 형님집이다. 그 옆으로 이발소, 작은 골목 옆 소생약국, 일섭 형님 2층 여관, 서울약국 등이 있었다. 서울약국 건너편에 광자네 집이고 그 오른 편에 태흥여관이다. 광자집서 풍덕다리 쪽으로 영택이집, 골목 안에 역전목욕탕, 서울다방, 엿기름/누룩을 파는 경종이 집이 있었다.


 엄니와 내가 살게 된 집은 역전시장으로 광자네 집 앞 움푹 패인 지대가 낮은 곳이다. 황토 흙 돌 벽돌로 닥치는 대로 담을 쌓은 집이다. 지붕은 널빤지나 보해공장 소주 찌꺼기로  비가 세지 않도록 덮었다.  하지만 비가 올 경우 바께스와 대야를 방 두세 군데 놓고 앉아서 세우 잠을 잤다. 그 집 부엌에서 밥장사를 하고 방 한 칸을 썼다. 낯설은 역전바닥으로 와서 여기저기 세숫대야로 물을 받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던 장마철에는 초가지붕이지만 비는 전혀 새지 않았던 상인제동도 그립고 형 누나도 보고 싶고 친구들도 보고 싶었다. 그 때 엄니나 나나 자주 불렀던 노래가 남진의 ‘울려고 내가왔나‘이다.

”♬♫ 울려고~ 내~가 왔나 누굴찾~아 여~기 와왔나 낯 설은 타향 땅에 내~가 왜~ 와았나 하늘마저 나를 울려 궂은 비는 내리고 무정할사 옛사람아 그대 찾아 천리길을 울려고 내가 왔나 간주중 ♫♪♩ ~생략~`이다.

엄니가 먼저 부르는데 내가 따라 부르면 엄니는 씩~ 웃으며 ‘싸가지 없는 자슥’하고 계속 불렀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린 놈 ‘자슥‘이 발랑 까져 갔고 어른 노래를 꼬박꼬박 일수(日收) 찍듯 따라 부른다는 뜻이라 생각된다.

 역전저자는 매일 새벽 네다섯 시부터 장이 열리고 오전 열한 시 정도에 끝난다. 주로 성산 율촌 신풍 덕양 미평 여수 대대에서는 전날 저녁 또는 새벽 고깃배에 잡은 해산물이 들어온다. 별량 수덕 야흥 대대 서면 석곡 해룡 등에서는 저녁 해거름이나 새벽에 일찍 딴 과일이나 야채가 들어온다. 외지에서 채소 과일 생선을 갖고 온 사람들은 오전 11시 이전이면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돈이 귀한 시골에서 순천 인근에 사시는 엄니나 할머니들이 각종 채소를 이고지고 와서 다 팔고  마지막 떨이를 우리엄니에게 주기도 하고 밥으로 바꿔먹기도 한다. 야흥동 선암마을 해룡면 등에서 새벽 일찍 시장에 온 엄니들은 집으로 가기에는 너무 배가 출출하면 우리집에 들른다. 대게 세 명이 오면 세트 메뉴인 막걸리 한 병에 보리밥 한 덩어리 들어간 뜨끈한 시래기국을 시킨다. 막걸리 한 병을 세 분이서 나눠 마시고 밥 한 덩어리 넣은 시래기국을 두서너 번 숟가락으로 떠서 시장기 있는 배를 임시로 달랜다. 5원에서 10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돈은 오늘은 ‘최샌덕’이 내고 다음 저자에 올 때는 ‘황샌덕’이 내는 식으로 값을 치른다. 당시 짜장면이 10원 할 때이니 역전시장 백반 한 상은 20원 받았으니 막걸리 한 병과 시래기국 세트는 5원 안팎이었을 것이다. 머리가 졸은 엄니는 둘이든 서이든 나누기 편하게 6원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마른 생선 미역 김을 파는 건어물 가게와 콩나물집과 두부집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장 안의 선술집과 상가들은 오전 11시쯤 장사를 접고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오후에는 내일 저자에서 쓰일 찬거리를 준비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엄니는 도저히 살 길이 없어서 형과 누나는 송강 고모집과 둑실 이모집으로 보내고 막둥이인 나만 ‘짠~해서‘ 데리고 역전으로 이사왔던 것이다. 하루 일이 끝나고 방이 비좁아서 새우처럼 옹그리고 누워서 눈을 감고 있으면 라디오에서 연속극 들어가기 전 노래가 흘러나온다. 구성지고 맑고 깨끗한 그 노래로 모든 것들은 녹고 녹아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다음 날 낮에도 흥얼거렸던 그때 그 노래는 가수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다.

“♬♫ 해~당화 피고지이~는 섬~마아으 으으으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 마아아아오 ♫♪♩ ~생략~`이다.

역전시장 하꼬방 그 좁은 방에 새우처럼 옹그리고 자고 오로지 끼니걱정을 하고 사는 시간은 역전시장을 철거할 때까지, 즉 내가 남초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5년간 지속되었다.
내가 9살까지 살았던 상인제동 골짜기의 하루하루의 일상은 앞산 남산 뒷산 산골짜기 개울물 도랑 논두렁밭두렁 언덕배기 강부자집 큰 마당, 돌담벽 사이사이 구불구불한 골목길 등에서 진행된다. 대체로 자연과 더불어 보내는 일상이다.
 하지만 순천역전(驛前)의 일상은 판연히 달랐다. 도회지의 멋진 신사숙녀 농어촌 어르신들 군인 학생 떠돌이 유량자 거지 약장사 장사꾼들 등 끊임없이 낯선 사람들이 오고갔다. 아침 저자에 오는 인근 주민들까지 이곳저곳을 왔다갔다 하니 역전은 조용할 날이 없다. 상인제동은 진주강씨 문중 사람들이 거의 90%이다. 공무원과 학교 선생이 몇 분 있지만 대부분 골자기 까끔과 기재에서 농사를 짓고 산다. 직업 성씨 움직임 등이 단조롭고 훤히 드려다 보인다. 그러나 순천역전은 약국 이발소 여관 여인숙 식당 양복점 세탁소 다방 목욕탕 화물과 대한통운 우체국 홍익회 파출소 건어물/야채/과일 가게 보해소주공장 대흥연탄공장, 철도청 합승정류장 등 다양한 직업군(職業群)을 이룬다. 정주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뜨내기 숫자가 더 많고 천지 것들을 다 모아 놓은듯해서 상인제동에 비해 거의 별천지였다.

 아버지가 공무원이나 선생, 또는 식당 여관 약국 가게를 하는 몇몇을 제외하고 나와 함께 놀던 친구들은 무허가 판자집과 하꼬방에 살던 아이들이다. 가난하고 두려움이 가득해서 오히려 무서울 것이 없는 듯 거칠었다. 먹고 살기 바쁜 부모들이라 자식을 눈여겨 볼 겨를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나 같은 또래 아이들 위에서 대장 노릇을 한 형들은 몇몇 배운 형도 있지만 대부분 ‘딱기(구두닦기)’ ‘조바(여관/여인숙/식당 삐끼)’ 풍덕다리에 주로 거쳐를 둔 ‘넝마’형님들과 주먹을 쓰는 깡패 건달 형님들이다. 당시에 형들이 좋아하고 폼나게 불렀던 노래는 가수 최희준의 ‘폭풍의 사나이‘이다.

“♬♫ 나는 유쾌한 드럼 치는 사나이 난폭한 놈이라고 불러도 좋다 싸움을 하느니 드럼을 친다 사랑의 슬픔도 미련한 아픔도 두들겨서 날려 보낸다 야 야 야 One Two One Two Three Four ~~~폭풍의 사나이 폭풍을 일으키는 유쾌한 사나이♫♪♩ ~생략~`이다.

‘폭풍의 사나이’는 딱~벌어진 어깨, 걸걸한 음성, 건방지며 멋진 눈웃음을 가진 일섭 형님이 특히 좋아했다. 내가 그 형님을 최고로 좋아했기에 나도 그 노래를 좋아했다. 그 형님 빽으로 초등학교 고학년 때 마을 콩쿨대회에 나가서 ‘폭풍의 사나이’를 불러 냄비를 타기도 했다. 그 때 기재 소전 옆에서 열리는 콩쿨대회에 쭈끄리고 앉아있는데 아주머니 아저씨 누나 형들이 가장 많이 부른 곡명은 펄시스터스(배인숙, 배인순 자매)의 ‘커피한잔’이다. 모두 자기 일처럼 심각하고 애타게 불렀다.

“♬♫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 봐도 왠일인지 오지를 않네♬♫ 내 속을 태우는 구려 팔분이 지나고 구분이 오네 일분만 지나면 나는 가요♬♫ 난 정말 그대를 사랑해 내 속을 태우는구려 오 그대여 왜 안 오시나오 내 사랑아 오 기다려요 오 기다려요 오 기다려요♫♪♩~생략~`이다.

 이 노래가 하~도 유행해서 다방 누나들이 커피배달 가는 걸 유심히 보면, 치마나 바지를 바짝 쪼여 궁둥이를 ‘으쌰으쌰’ 도시고 다녔을 정도다. 지독하게 가난하고 힘들었어도 산다는 게 그래도 살아볼만 하다고 생각 되는 것은 노래가 있었기 때문 아닌가 싶다.

--- To be continue ---

노래는 추억에 기대어 영그는가?라는 타이틀을 걸고 1962-3년부터 1968년까지 이야기를 하고 그 당시에 나 우리엄니 친지들이 기댔던 노래를 소개하고 있다. 이제 그 1/4을 쓴 것이다.  앞으로 2-3주는 초등학교 상급반에서 졸업, 중학교시절과 가요, 고등학교 시절과 가요, 대학교와 대학원시절에 대한 얘기와 가요를 소개하고자 한다. 부족한 얘기지만 애독해주시면 감사하겠다. 행복한 일월 둘째 주 되세요.
         2020.1.11. 0: 10 강길봉 드림


강길봉

강길봉 박사
강길봉 박사

약력:
* 순천 태생, 순천매산고/단국대 법대(5.16 장학생)/고려대 대학원 졸(행정학석사/박사)
* 고시학원 강의(종로/노량진/신림동 24년)
* 고려대, 서울시립대, 행정안전부, 광운대 강의(외래/겸임/강의전담교수)
* 최신행정학(육서당,2000, 20판), 최신행정학(새롬, 15판) 행정학개론(21세기사,2019), 외 저서 및 논문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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