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 강길봉
  • 승인 2020.01.18 15: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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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추억에 기대어 영그는가 (#2)

국민소득 100-200달러 수준인 1960년대 한국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빈곤이었다. 보릿고개가 있던 당시의 순천과 주변 지역의 빈곤도 심각했다. 1965년을 전후로 순천시내 국민(초등)학교는 북교 남교 성동교 동교(1967년 개칭)가 있고, 그 당시 중앙 지역도 아니면서 다소 헷갈리게 역전 인근에 중앙교가 있었다. 중심지에서 5리~10리 밖 주변에 조례교 도사교 인안교 동산교 등이 있다. 순천의 중심지인 중앙로(中央路)는 오리정,도립병원(순천의료원)오거리→남문다리→남교오거리→순고오거리→당시 C지구(지금 하인제동 시작점) 끝 성남다리(당시 동교다리)까지 시내를 관통하는 도로다. 중앙로(中央路)에 근접해 있는 남교 북교 성동교 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넉넉했다. 다소 거리가 먼 곳에 있었던 중앙교 아이들 중 당시 가장 근대적인 주택인 철도관사 아이들과 역전에 있는 대한통운 약국 여관 몇몇 큰 식당 아이들은 부유했다.

동순천 역사
동순천 역사 (출처:전남 소상공인 상생 협동조합 블로그)

하지만 이들은 전체 학생들 중 15% 미만의 소수에 불과했다. 성동은 둑실과 동순천역 근방 아이들, 동교는 상인제, 남산 밑 농촌지도소 입구 인근과 거기서 떡방앗간 밑 덕월동 언덕과 골짜기 등에 사는 아이들은 가난했다. 중앙교는 역전의 하꼬방(판자촌) 아이들, 풍덕동 뚝길 아래, 철도청 테니스장과 정미소 맞은편 조곡동 동네 아이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내가 다녔던 남교는 상인제동과 순천여고뒷편 갈마굴제 주변, 성신원 뒤편 언덕에 있는 판자촌 동네, 옥천을 따라 좌우 판자촌, 간댕(寒天 かんてん, 일본어 발음 ‘칸텐’을 ‘간댕’으로 발음) 공장 좌우 옥천에서 ‘도치소’ 가는 천변 엿가락처럼 늘어져있는 집 아이들, 공마단 길 위나 매곡동 골짜기에 사는 아이들이 대체로 가난했다.

졸업 후 많은 세월이 지난 후, 도사 야흥 별량 해룡 율촌 서면 학구 등 친구 선후배들과의 얘기를 하다보면, 그들 중 상당수가 “순천 시내 산 사람들은 다 부자인 줄 알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아마 순천시내 아이들 중 다소 과장해도 15%에게만 해당된다. 나나 내가 친하게 지냈던 대부분의 친구들은 순천 시내이던 아니면 주변에 살았던 매우 가난했다. 시내보다 오히려 주변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친구들은 논밭을 직접 일군 부모들인 까닭에 끼니 걱정을 덜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는 국민 대다수가 가난이라는 덫을 벗어나지 못했던 시기이다. 우울했고 내면 깊숙이 속울음을 울고 있을 즈음이다. 그 노래가 우리를 울렸다. KBS 2TV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에서 백청강이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고, 옛 생각이 나서 울컥했던 곡이 있다. 가수 배호의 ‘누가울어’이다.

“♬♫소오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 누가 우우울어 이 한밤 잊었던 추억이이인가 머~얼리 떠 ~나간 내 사랑은 도오라 올~ 길 없는데 비가 맺히게 그 누가 울어 울어 검~은~ 눈을 적↗시나 ♫♪♩~생략~`이다.

한국인 대다수의 가슴에 피멍처럼 아롱진 한은 가난이다. 이 가난이 1960년대 말 서울과 인근 경기도로 인구유입이 가속화되면서 불평등이라는 새로운 사회문제를 벽돌 위에 겹쳐서 벽돌을 올려 놓듯 추가/확대되었다. “사람은 서울로, 말(馬)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에 홀린 듯, 농촌 총각처녀들의 서울 유입은 성공에 대한 망상로(妄想路)였는지도 모른다. 그때 일어난 사건이 있었다.

어느 가난한 시골처녀 동숙은 구로공단(현 가리봉)에 취업했고 10년 동안 월급의 대부분을 부모와 동생들을 위해 부쳤다. 어느 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면서 못다한 학업의 꿈을 키워나간다. 그러던 중 학원의 한 총각 선생을 만나 사랑에 빠져 그를 위해 밥 세탁은 물론 적금 등 몸과 맘을 다바쳐 헌신한다. 그런데 어느 날 동숙은 선생님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사실 확인을 하러 그에게 달려갔지만 “돈 몇 푼으로 어찌 해볼 생각이었냐.”는 말을 남기고 그는 돌아선다. 동숙은 그동안의 삶을 비관하게 되고 원한에 맺혀 그만 그를 칼로 찌르고 결국 살인미수죄로 복역하게 된다.

이 사건을 테마로 해서 슬픈 사연과 함께 그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왔다. 그때 저잣거리의 많은 사람들은 마치 자기 새끼들 일인 것처럼 ”아이고 불쌍한 거, 어쩌끄나 이~~.“하며 혀를 차고 눈을 찡그리며 슬퍼했다. 그때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나온 노래가 여학생인데 변성기를 지난 저음의 남자가 부른 것처럼의 목소리다. 가수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다.

“♬♫ 너무나도 그~니이이임을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변~했어 사무친 미움↘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에~ 돌이킬 수 없는죄↗ 저질러 놓고 흐느끼면서~ 울어도 때↗는 느으즈으리~ 때는 늦으리~. ♫♪♩~생략~`이다.

상인제동에서는 산 강 개울 논밭으로 무엇인가를 보고 잡고 해질 녘까지 놀았다. 산이나 산에 딸린 야트막한 과수원에서 익든 덜 익든 과일을 따서 먹고, 무 고구마를 캐서 먹었다. 논가에선 빼비를, 나락이 익든 말든 논에서 깜부기도 먹고, 메뚜기를 잡아 질기고 가는 나뭇가지로 꿰어가지고 구어 먹었다. 보리가 고개를 막 숙일 때 즈음엔 어른들이 자는 틈을 타서 모가지만 따서 불에 살짝 구워 두 손바닥 사이에 놓고 싹싹~ 비벼 노랗게 된 보리알을 골라 먹었다. 인제동 골짜기 개울과 도랑에서 장어도 잡고 돌팍을 뒤져 가재도 잡아 구워 먹었다. 한 여름엔 산초나무를 돌로 찍어 비교적 좁은 개울 입구와 출구를 막고 배때기가 뜨는 놈은 먼저 건져내고 ,바께스로 물을 살살 퍼서 물밑에 있는 큰 고기를 잡았다. 옥천이나 장대다리 밑에까지 가지 않아도 좋았다. 순고 뒤 계단식 논, 상인제동 골짜기 아래의 논과 밭 개울과 도랑만 있어도 뛰어놀기에는 충분했다. 상인제동에서 친구들과의 놀이는 주로 자연 속에서 이루어졌다.

60년대 순천역사
1966년 순천역 (출처:국사편찬위원회 웹사이트)

반면 역전에서의 하루하루는 상인제동과 너무 달랐다. 역전아이들의 생각과 행동도 달랐다. 낮에는 순천역 역장님실 문 양쪽 향나무를 골문으로 하고 반대편은 파출소 정문에서 일차선 도로로 나가는 커브 지점과 거기서 사람 키 만한 곳에 돌을 놓아 골대를 만든다. 보자기 양옆을 단단하게 묶고 그 속에 짚 고무 신문지 째진 신발 등을 넣고 입구를 새끼줄로 묶어서 만든 공으로 축구(蹴球)를 했다. 역 광장서 무슨 행사를 하거나 아이들이 많으면 형들이 철도관사 앞 큰 운동장에 가서 축구를 했다.

나무로 칼을 제법 그럴싸하게 만들고 신문지나 은박지 같은 것으로 모양을 낸 뒤에 끝을 조금 무디게 만들어서 칼싸움을 했다. 편을 갈라서 칼에 찔린 놈부터 게임에서 빠지고 마지막 남는 아이들이 많은 편이 이긴다. 이긴 편은 진 편이 만든 기마자세에 올라타고 역전 한 바퀴를 ‘으시대며’돈다. 진 팀은 땀을 뻘뻘 흘리며 기마자세로 이긴 사람을 차례대로 태워서 역 광장을 한 바퀴 돌아온다.

밤에는 순경/도둑놈 놀이를 한다. 또래 친구들끼리 두 놈은 도둑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순경이 되어 숨어있는 도둑 두 놈을 잡는 게임이다. 으슥한 데가 하도 많아서 잡기가 수월하지 않고 무섭다. 일정 시간 내에 잡지 못하거나 잡히지 않으면 게임에 승리한다. 꿀밤을 맞거나 무엇인가 거래를 한다.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돈 줍기도 있다. 역전에 사람들이 엄청 부쩍거릴 때는 사월초파일, 추석 설 대목, 논산훈련소 입영열차를 타기 위해 형들이 역전광장에 집합하는 날이다. 사월초파일 오후 대여섯 시 경이면, 역전에서 땅만 보고 다녀도 최소 5원은 주울 수 있다. 특히 역내에서 표를 파는 곳이 가장 핫(hot)한 데다. 그 자리를 차지하면 최소 10원은 가능하다. 10원이면 붕어빵+맘모스극장+달콤한 카라멜까지 먹을 수 있는 아이들에겐 엄청난 돈이다. 당시는 지갑이 일반화되지 않고 바지 양쪽 게비(호주머니)가 야무지게 닫혀있지 않아서 일원(십환) 짜리나 오원(오십환 은동전) 짜리 동전이 손을 넣고 빼는 동작을 하다보면 흘린다.

당시 오십원 백원 짜리 지폐(紙幣)는 무서우니까 파출소에 신고한다. 하지만 십환 오십환 짜리 동전(銅錢)은 땅에 떨어져있으면 얼른 밟고있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없을 때 주어서 그 자리를 피하는 식으로 돈 줍기를 한다. 설대목이나 추석 때도 약주 드시고 열차를 타고내리는 어른들이 많아서 순천역전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그때도 땅만 보고 다니다 동전이 떨어져 있으면 누가 먼저 볼세라 감쪽같이 밟고 있다가 이리저리 눈치를 살핀 후에 줍고 그 자리를 피한다.

그 당시는 논산훈련소 입영열차를 타기 위해 역전광장에 집합을 한다. 일 년에 두세 번 동부 여섯 군(郡)에서 입영열차를 타기 위해 역전광장에 모이는 날이다. 인근 가게에서 껌이나 박카스를 떼어와 마치 열차 칸에서 홍익회 아저씨들처럼 “껌이나 박카스!”를 외치며 팔았다. 껌 사이다 계란 등이 많이 팔렸는데. 나 같이 어린 것들은 껌을 주로 팔았다. 머리를 싹 밀고 오만걱정을 다하고 있는 형들을 훈련소로 보내는 자리엔 울고 있는 누나(애인)이나 부모님들이 계신다. “기차 안에서 눈물 나고 답답할 때 계란은 목 몽치니 껌이 최곱니다.”라고 눈을 마주치면 그냥 사준다. 그때 역전과정에 스피커로 논산훈련소로 가서 6주 훈련을 받으면 자랑스러운 이등병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올려주는 노래가 나온다. 그것은 봉봉사중창단의 ‘육군 김일병’이다.

“♬♫ 신병 훈련 육 개월에 작대기이 두개 그래도 그~으게 어디냐고 신나는 김~일병 헤이 부라보 김일병 기상 나팔에~는 투덜대지만 헤이부라보 김일병 식사 시간에는 용감한~병사~중략~~ 나는야 졸병이지만 그녀는 멋쟁이 백발백중 사수에다♫♪♩~생략~`이다.

무엇보다도 역전에서는 사월초파일과 형들이 논산훈련소로 가기 위해 역전광장에 소집될 때가 가장 수입이 짭짭했다.

역전 저잣거리와 주변에서 매일 할 수 있는 장난 짓거리는 과일도둑질이다. 수박은 커서 불가능하고 한 손을 쥐고 달릴만한 과일을 훔치는 일이다. 배가 고프고 장난기 있는 아이들 중 봉숭아 자두 참외 살구 감 포도를 한두 개 훔치는 일이다. 아저씨 젊은 엄니들 누나 형들 것은 절대 훔치지 않는다. 잡히면 허천나게 맞고 엄니에게 끌려가서 개망신을 당하고 병신 같이 잡혀왔냐고 또 맞는다. 늘 맘씨 좋고 나이 드신 할머니들이 주요 대상이다. 할머니가 광주리에 복숭아 자두 참외를 쌓아놓고 팔고 있다. 할머니 앞에 과일 구경하는 척 하고 할머니 눈만 바라보고 앉아 있다. 만약 할머니가 어만 데를 보거나 흥정을 위해 다른 곳에 눈을 돌리시면 과일 하나둘을 집어서 호주머니에 넣고 슬그머니 일어나서 오거나, 잽싸게 할머니가 한 눈 판 반대방향으로 튄다. 한 참 뒤에 알아도 할머니 걸음에 쫓아오지 못한다. 열 명이 넘는 역전 아이들 중 하루씩만 과일 한 두 개를 훔치는 도둑질을 바꿔가며 하면 지나가도 누구인지 모르게 된다. 집에도 다 할아부지 할머니가 계시니 한두 개 훔쳐서 서로 번갈아가며 입으로 몇 번씩 베어 먹는다.

휴일이면 도둑열차를 탄다. 홍익회 옆 뚫어진 철조망 사이로 기어들어가서 여수 남원 송정리진주행 열차를 표도 없이 승차한다. 송정리 열차는 맨 끝칸에 있다가 원창역 수덕역을 지나 벌교역 쯤 가면 네 번째 칸에 표검사하는 차장이 있다. 벌교역 정차할 때 잽싸게 내려서 세 번 째 칸으로 이동하고 송정리역 어디에 개구멍이 있는가를 알면 어디든 공짜로 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역전 아이들은 도둑열차 타고, 수덕역 별교 송정리 신풍 만성리 등을 자기집 드나들 듯 공짜로 다닌다. 만성리 해수욕장이나 여수 오동도는 백 번도 넘게 갔었고 열차 안에서 엄니를 만나기도 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엄니 친구들이 하루 날 잡아서 여수 오동도로 놀러 가는데 열차 안에서 학교 가 있을 새끼를 본 우리 엄니의 당황한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다음날은 또 짐승처럼 울부짖고 맞는 ‘매타작‘당하는 날이다. 엄니는 서서히 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꼬방에 살거나 집도 없이 포장을 치고 사는 아이들은 언제나 배가 고프고 하루 종일 심심하다. 낮에는 나무를 주워서 팥죽이나 팥 칼국수로 바꿔먹고 대한통운이나 선로 주변에서 쇠꼿 혹은 쇠꼿 몽뎅이를 모아서 고물상에 팔아 국수나 국화빵을 사먹었다. 겨울에는 대한통운 철조망을 뚫고 들어가서 소주공장 갈, 빼깽이(고구마) 자루를 구멍 내서 꺼내먹기도 했다. 육십이 넘은 지금도 식탐(食貪)은 줄이지를 못하고 있다. 아마 어릴 적 걸신(乞神)이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는 거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시내 집이 조금 넉넉한 아이들은 교과서 외에 표준전과도 사서 공부했고, 방과 후에 끼리끼리 모여서 공부도 하고, 또 어떤 아이들은 과외도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와 함께 어울려 다니는 역전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책 한 번 떠들러 본 적도 없이, 공부와는 전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살았다. 그런 희망도 없고 속창시도 없는 새끼들을 보며 사월 초파일에 향림사 갔다 오는 길에 엄니와 역전저잣거리서 장사하시던 엄니친구들이 부른 노래는 가수 남진의 ‘가슴 아프게‘이다.

“♬♫ 당~신 과 나아~아 사이에 저 바다가 없~~써었다~면 쓰으 라리인~ 이별 마아아는 없었쓰을 것어어었을 해~저문 부우우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으을~가슴 아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 보오지 않았으리~ 갈매기이도 내 마으음 같이 목메에~여 우우우우운다 짜라라라라라랏 짱♫♪♩~생략~`이다

여름밤 순천역전 동그라미 공원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수은등이 켜있다. 밤이 깊어지고 어두움이 짙을수록 수은등의 파란 불빛은 더 휘황하게 빛이 났다. 네 개의 수은등 불빛을 따라 크고 작은 부나방들이 수은등에 다닥다닥 붙기도 하고 주변을 크고 작은 원을 그리며 날아다닌다. 서울로 가는 막차가 막~떠나고 여수행 막차가 끝나는 밤 열두 시 즈음이면 나비보다 더 큰 나방이 수은등을 에워싸고 날아다닌다. 부나방이 파닥거릴 때 마치 수은등이 껐다 켰다 한 것처럼 착각할 정도였다. 밤이 이슥한 데도 마땅히 반겨주는 이도 없고, 완행열차도 놓쳐 내일 아침 열차를 타야하는 사람들, 집이 없는 지게꾼들이나 유랑하는 거지 아저씨들이 수은등을 바라보며 희망이 없는 내일을 무담시 기다린다. 이때 밤하늘에 띄워보낸 노래는 무엇일까. 그것은 가수 김상국의 ‘불나비사랑’이다.

“♬♫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야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사연 차라리 재가 되어 숨진다 해도 아아 너를 안고 가련다 불나비 사랑 ♫♪♩~생략~`이다.

순고 뒤 산골짜기 동네서 역전으로 이사 온 이후 초등학교 2-3학년의 생활은 그전의 9년 동안의 세상과는 딴 판이었다. 학교가 먼 것도 하나의 작은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정신줄을 놓아버린 것 같다. 아침에 분명히 책보 싸매고 학교에 간다고 나온다. 하지만 나이롱극장, 2자와 7자 들어가는 날은 아랫장, 장대다리나 철교 아래, 기재논과 도랑, 철도관사와 철도운동장, 동순천 다리 밑, 홍암중학교와 죽도봉, 소전을 지나 철도교차로에 도착했는데 나이롱극장이 열리지 않을 때 철길을 따라 무작정 그 끝이 없는 기재논길을 따라 걷는다.

도랑을 타고 올라가면 양율다리가 나온다. 다리 건너 작은 산 몬당 밑에 쓰러져가는 듯한 초가집이 한 채 있다. 양율다리 건너 냇가 안쪽 논두렁엔 옹기종기 이십 여 개 넘는 집들이 다정하게 있다. 이곳저곳 그저 무작정 돌아다니다 학교 파할 때까지 놀았다. 학교 파할 때 다른 아이들이 학교에서 오는 시간이면 집에 들어가서 책보 놓고 엄니가 시키는 일을 하고 나온다. 그 후 학교 갔다 온 아이들이나 학교를 가지 않는 아이들과 밤늦게까지 역전에서 놀다가 들어간다.

그렇게 땡땡이 치고 학교를 가지 않았으므로 2학년 때는 몇 학년 몇 반인지 어디가 내 자리인지도 몰랐다. 가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학교에 갈 때면, 교무실에서 이름을 대고 몇 반인지 알아보고 교실을 찾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1971.2.6.졸업했다. 2020.1.14. 학교에 들러 행정과에서 ‘생활기록부와 성적표’(발급번호 2020-6)를 신청해서 받아봤다. 2학년 1반 24번(김월선 선생님 담임), 결석일수가 70일이고, 특기 및 지도사항에 “두뇌는 영특하나, 결석이 많고 게으름을 피워 실력을 발휘치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적은 당연히 ‘우’나 ‘수’가 없었다. 엄니가 그 사실을 알고 토요시 연재 제16회에서 고백했듯이 “분(憤)을 애써 참았던 엄니는 깨댕이를 벗긴 채로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목 놓아 울면서 너 같은 자식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듯 매질을 했다.”고 고백한 적 있다. ‘생활기록부와 성적표’에 의하면 3학년 때는 두 번 지각과 조퇴가 있었다. "국어과와 사회과에 좋은 경향을 보이고 있으나, 가정복습이 철저해야 함“이라고 적혀있고 성적은 ”미“가 대부분이었다.

초등 2학년에서 3학년 마칠 때까지 난 ‘돼먹지 않고’ 엄니가 말한 ‘싸가지 없는 자슥’으로 지냈고 환갑이 넘은 지금 나이에도 그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혀 딴판인 11년간의 ‘피도 안 마른’ 나의 유년시절의 일탈은 오십 이후 유랑(流浪)과 방랑(放浪)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질긴 끈이 되었다. 그 고래 심줄 같은 강한 내면의 끈으로 인해 현재의 나는 비교적 조용하게 늙어가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에서 가장 철없고 무모했지만 낭만 어린 그 시절도 1967년 가을이 가면서 사라지고 다시는 그런 철없던 낭만의 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 To be continue ---

행복한 나날 되시고 설 연휴엔 더욱 재미와 보람 있으시길 빕니다. 설 연휴에도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2020.1.19.1:00 강길봉 드림


강길봉

강길봉 박사
강길봉 박사

약력:
* 순천 태생, 순천매산고/단국대 법대(5.16 장학생)/고려대 대학원 졸(행정학석사/박사)
* 고시학원 강의(종로/노량진/신림동 24년)
* 고려대, 서울시립대, 행정안전부, 광운대 강의(외래/겸임/강의전담교수)
* 최신행정학(육서당,2000, 20판), 최신행정학(새롬, 15판) 행정학개론(21세기사,2019), 외 저서 및 논문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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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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