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 강길봉
  • 승인 2020.02.01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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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추억에 기대어 영그는가 (#4) -역전시장의 역사-

길은 인간이 그 역사를 만들고 완성시키는 에너지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을 시작으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에 그 대문(大門)을 활짝 열어주고 그들과의 길을 텄다. 일본이 특히 눈독을 들인 것은 최첨단 무기와 철도기술이다. 가공할만한 무기와 길고 흡인력 강한 철도(鐵道)는 나라 간의 국경을 허물고 원하는 바를 쟁취하는데 긴요했을 것이다.

1899년 경인선, 1900년 한강철교, 1904-5년 경부본선(京釜本線) 철도, 1914년 호남본선(本線)<대전-목포>와 군산선<이리(익산)-군산>, 1930년 경전남선(여수-순천-광주)과 1936년 전라선(전주-순천)에 완공에 주력했다. 기술공정은 완전하게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조선 사람들을 배제시켰으며 철저하고 무자비하게 노동력을 착취했다.

1933. 5.~ 1940. 11.사이에 영업, 운전, 보선을 담당하는 현업기관인 ‘철도사무소(지방철도청)’를 부산, 대전, 서울, 평양, 순천(전라남도), 원산, 성진(김책), 강계 등 8개 도시에 설치하였다. 1930년 개설(開設)된 순천역은 지리적 여건을 감안한 일본의 전략지점인 셈이다. 순천역사는 6.25 동란으로 완전히 불타 없어졌으나 1960. 10. 30. 역사(驛舍)를 신설 준공했다.

1966년 순천역 (출처:국사편찬위원회 웹사이트)
1966년 순천역 (출처:국사편찬위원회 웹사이트)

개설된 철도를 바탕으로 농수산물, 특히 호남남부 지역의 쌀을 목포항으로 집결시켜 본국으로 이송시키기 위함이다. 호남북부와 충청도는 군산항이 집결지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경전(慶全)선은 낙동강 유역의 삼량진(경부선)과 호남선 송정역을 잇는 총연장 300.6Km의 철도이다. 경전선 중 진주~순천 구간은 해방 이후 1968. 2. 8.에 개통되었다. 우리가 아련하게 떠오르는 역이 있을 것이다.

출발은 낙동강이고 이어서 한림정~진영~창원~마산~중리~산인~함안~군북~원북~평촌~진주수목원~반성~진성~갈촌~남문산~개양~진주~유수~완사~다솔사~북천~양보~횡천~진상~옥곡~골약~광양~평화~순천~수덕~원창~구용~벌교~조성~예당~득량~보성~광곡~명봉~도림~이양~석정리~입교~능주~만수~화순 ~중략~ 동송정, 종착역이 광주 송정역이란다.

순천 역전시장
순천 역전시장 (출처: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블로그)

순천역전 저잣거리(역전시장)는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 철도역사(鐵道驛史)의 투사와 추론((project or conjecture)에 기대어 파악해 봤다. 1966년 2월 순천역은 끊임없이 벌교 광주 덕양 여수 전주 이리로 가는 사람들로 넘쳤고,. 장날(2일과 7일)을 빼고는 생선 과일 채소 건어물을 팔고 사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실제 나는 그 후 십칠팔 년 넘도록 몸소 체험했다. 당시 일등여관(희자네) 은진여관(태수집) 주인장의 얘기로 역전에 정착한 지 오륙년이 넘었다고 들었다.

기차역을 빼고 역전시장을 생각할 수 없다. 실제로 저잣거리에 농수산물을 팔러 온 사람들의 행선지가 걸어서 오가는 데는 한계가 있고 그 방향도 기차역과 관련이 깊다. 기차(汽車)를 타고 생선 채소 과일을 팔러 온 사람들은 네 방향이다. 하동 진상 광양 옥곡 평화(진주→순천), 수덕 벌교 득량 구용 보성 조성 예당(송정리→순천), 성산 율촌 신풍 덕양 미평 여천 여수(여수→순천), 괴목 봉덕 구례 압록 곡성(전주→순천) 등이다. 대대 야흥 선암 학구 동산 해룡 등에서는 시내/시외 합승버스에 채소 과일을 싣고 역전시장으로 왔다. 순천문화원 부원장 진인호씨는 “순천역이 들어서기 전 역전역 자리는 허허벌판이었다.

1930년 순천역이 들어서면서 임시상가가 들어서고 음식점이 생겼다. 처음에는 성산 율촌에서 그물로 잡은 물고기(소위 발고기)를 파는 사람들에 의해 저자가 생기게 되었다.” 고 했다. 열차를 타고 내리는 승객들이 있으니 과자 음료수 사과 계란 등을 파는 가게가 먼저 생겼을 것이다. 사람이 드믄 어촌보다 인구가 많은 순천역전으로 성산 율촌의 생선 장사들이 와서 고기를 팔았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인근 시골에서 새벽에 딴 과일 채소를 역전 대합실 밖에서 물건을 팔았다.

그리고 역사(驛舍)가 1960년에 신축되면서 승객들의 편리와 역앞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 일차선 도로 너머로 생선장 채소장 과일장을 이전 집약시켰다. 특히 경전선 중 ‘진주→순천’이 개통되면서 하동 광양 골약 평화 지역 사람들까지 시장에 가세하면서 커졌다고 본다. 결국 역전시장(역전저잣거리)는 1950년 중엽에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춘 시장으로 생성된 것이다. 1966년 내가 본 순천역전 저잣거리는 성시(盛市)인 오전 8~10시 때는 당시 ‘순천남교 가을운동회‘에 버금갈 정도로 웅성거렸다.

사람들로 북적거린 역전시장도 사람들이 뜸한 때도 있다. 어떤 날은 생선 채소 과일을 팔려고 나온 사람들이 사러오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 순천 아랫장(큰장)이 서거나 장날 다음 날이면 그렇다. 태풍이 와서 고기를 잡을 수 없어 시장에 고기가 씨가 말랐다고 하는 때도 있다. 긴 장마로 시장이 한산한 때도 있다. “장사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니고, 오늘 장사는 이미 글렀네. 안 긍가.” ‘그라제이‘ 주적주적 사나흘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시래기국에 막걸리 한 사발씩 목에 넘기며 조곤하게 앉아 부르는 노래가 있다. 남진의 ’가슴 아프게’이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거어어어슬

해 저믄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 같이 목메어 운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연락선이 없었다면~중략~♬♫

초등학교 1학년 때는 노란 벤또(도시락)에 맛있는 강냉이 두 국자를 담아 주면 그것을 먹고 신나게 집으로 온 기억이 있다. 3학 년 때 무상급식은 우유를 살짝 섞어서 약간 딱딱한 네모잡이 옥수수 빵이다. 조금이라도 오래 씹기 위해 아예 입에 넣고 죽이 될 때까지 씹어 넘기기도 했다. 4학년이 되니, 속에 팥도 없고 그냥 빈 동그랗게 생긴 홀쭉한 빵 두 개를 줬다.

달콤한 앙꼬(삶은 팥)는 없지만 씹는 뒷맛에 고급스런 향내가 나서 좋았다. 상급반이 되고 학교에 가능한 결석하지 않았다. 가만히 보니 부유한 집 아이들과 나처럼 가난한 집 아이들은 점심시간에 큰 차이가 났다. 함께 잘 어울려 다니는 친구 중 행동에 사는 허명선이를 빼고는 영택, 동만 등 몇몇은 무상급식을 먹고 앉아있기 멋적하니 바로 운동장에서 나가서 뛰논다. 빵을 먹으면서 친구들의 도시락 냄새에서 부자 티가 확~나는 걸 눈과 코로 알 수 있었다.

사각진 네모잡이 도시락에 콩자반, 설탕이 빤질빤질하게 묻은 멸치복음, 계란말이, 윤기가 자르르하고 엄청 흰 쌀밥을 보면 먹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고 한 없이 부러웠다. 치과 아들인 안경잡이 창석이는 점심 때, 밥 도시락, 반찬 도시락, 거기다 물통까지 케이스가 세 개나 되었다. 젓가락질을 서툴게 해서 놀다 들어가도 아직도 먹고 있는 경우도 있다. 반만 먹고 나머지를 나에게 먹어보라면 한 입에 다 털어넣을 것 같았다.

1968년 초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했다는 사건으로 역전 형님들은 가끔 짙은 청색에 검정 점의 군복(향토예비군)을 입고 다녔다. 군대를 가는 형들은 복무기간이 엄청 길어졌다고 투덜거렸다. 고등학교 형들은 군대교육을 받는 듯이 개구리 복장을 챙겨 학교에 가느라 가방이 복어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풍이나 기재 논에서 가지런하게 벤 나락을 탈곡기에 넣고 알은 알대로 볏짚은 볏짚대로 분리하느라 분주하다. 한두 마지기 논을 갖고 있는 집들은 대게 서로 품앗이로 추수를 했다.

여러 집들이 한 집 논에 모여 나락을 베고 해질 녘까지 탈곡을 해서 가마니에 담는다. 몇 가마는 방앗간으로 가고 남는 것은 집에 쟁여놓고 다음 날에는 함께 이웃집 논에서 나락을 베고 추수를 한다. 나락을 베고 볏단을 만들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야무지게 묶어두고 넓은 논바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이삭줍기를 한다. 한창 추수철이라 바쁜데 또 울진삼척에서 무장공비가 떼거지로 침투해왔다고 난리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모두다 ‘이승복 어린이’ 이야기뿐이었다. “120명의 무장공비들은 공포에 질려 머뭇거리는 주민들을 대검으로 찌르거나 돌로 머리를 쳐서 죽이기도 하였다.”고 라디오에서 나왔다. 나보다 2년이나 어린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죽음 앞에서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그런 일을 당한 것처럼 소름이 끼치고 무서웠다.

겨울방학이 가까워지는 어느 날 교실 내 창가 쪽 스피커에서 소방서 옆 기와집 사는 같은반 양대승의 목소리가 들렀다. ‘국민교육헌장’ 낭독이다. 그날 대승이와 C지구 사는 태순 승호와 함께 시민회관 건너편 목제소 골목을 지나가다 뜬금없이 내가 물었다. 아니 오륙학년 형들도 있고 전교 1, 2등인 송미경 정순일 김현웅도 있는데, 뭣 땜새 니가 스피커에 대고 낭독을 했냐고 물었다. “나도 모르는데, 선생님이 5,6학년들은 중학교 시험 땜에 바쁘니, 4학년인 나에게 시켰다.”고 약간 으스대듯 대꾸했다. 그날 이후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는 것이 학교에서 생사를 가르는 일만큼 중요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중략~~~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 정 희

완전 개근은 아니지만 아파서 한두 번 조퇴와 지각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4학년은 착실하게 학교에 다녔다.

그래서인지 4학년 생활기록부에 ‘사회’와 ‘실과’에서 초등학교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우’를 그것도 두 개나 받았다. ‘양’없이 나머지는 모두 ‘미’였다. 성적표를 엄니에게 보여줬더니, “이게 잘했다는 거냐?” “아니 엄니 이거 봐 ~바, ‘우’가 두 개나 있는 거 안 보인가.” 마치 큰 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째래 봤더니, “꼴등은 아니구만, 근디 니보다 공부를 못하는 놈은 벤또 싸와서 학교에서 뭐 한다냐.” “그걸 어째서 나한 테 묻는 당가. 알고 싶으면 나가 델다 줄 텡게 엄니가 물어보소.” “염~병 헌 갑다. 할 일이 그렇게 없냐.” 그렇게 1968년 4학년은 지나갔다. 시민다리 옆 시민극장에서 봤던 ‘빨간마후라’의 영화배우 신영균씨의 늠늠한 모습이 아른거린다. 내마음속의 또 노래가 나온다.

빨~간 마후라↗는 (짠짠)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마후↷라 음~ (짠짠) 빨↗간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구름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 짠짠짠~ ♬♫ ♬♫

1969년 5학년이 되었다. 4학년 2반 담임선생님과 학생은 그대로 5학년 4반으로 되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 정도 더 학습 시간이 늘어서 학교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동네 형들이나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 점점 없어졌다. 가끔은 태순 승호 대승 병균 등 친구들과 해질녘까지 널따란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놀았다. 남교오거리서 시청으로 가는 길 양쪽에 매달린 커다랗고 흰사각천에는 ‘북괴남침 에고 없다 자나깨나 총력안보’가 팔락거렸다. 또 조금 지나가니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건설하자’ 등 구호가 펄럭거렸다. 전봇대마다 ‘엄마는 신고하고 아빠는 잡아내자’ ‘자나깨나 불조심’ 표어가 붙어있다.

초등학교 때 소풍은 주로 남산 죽도봉 하풍 도치소 등이 단골메뉴다. 1969년에는 그해 준공한 덕양 삼일면 호남정유공장으로 갔다. 초등학교 때 남아 있는 두서너 장의 사진을 보니 사진 뒷면에 1969년 봄 소풍이라 적혀있다. 엄니는 아침에 ‘반짝’ 하는 저자라서 도시락을 싸줄 여건이 되지 않았다. 저잣거리서 파는 설탕 범벅이된 도너츠 몇 개를 도시락에 싸갔고 갔다. 소풍 때 김밥 사이다 계란을 싼다는 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도너츠가 맛있다고 바꿔먹자는 이상한 녀석들이 있었다. 사이다는 못먹었지만 계란과 김밥을 폼나게 먹었다.

1960년대 말엽, 보다 다양한 삶들이 역전에 머물며 오갔다. 일단 역전이니 지게꾼들이 많았다. 기차승객 때문에 ‘한 푼 줍쇼‘라고 손 벌리는 거지들도 많았고 휴가를 끝내고 부대로 복귀하려는 공수부대원들이나 해병대원은 술을 먹고 손님들에게 시비를 걸거나 밥값 술값 달라는 주인에게 행패를 부렸다.

특히 1965년부터 월남파병 이후 중간에 부상당해 귀국한 상이(傷痍)군인들의 곤조(못된 성질)와 행패는 지나쳤고 무섭기까지 했다. 식당에 들어와 백반과 막걸리를 먹고 “내가 나라를 위해 손목이 없어져 그 대신 갈코리를 달았는데 당신들은 우리들 땜새 편안하게 살았으니 이 정도는 줄 수 있지 않느냐.”고 고함을 치고 땡강(생떼)을 부렸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엄니 처지에 쉽게 물러설 수도 없었다. 엄니도 욕도 늘고 점점 사나워져갔다. 내가 물끄러미 엄니를 쳐다봤다. “엄니도 인제동 살 때 엄니가 아니구먼~~엄니가 무섭소.”라고 쏘아보며 말했다. 그랬더니 “사람이 독새(독사)가 되는 거 그거 한순간이다. 니가 알다시피 나가 첨부터 그런 거 아니여~~ ”하며 이를 악물면서 처다 봤다. 그동안 엄니한테 맞아도 나가 잘못해서 그런 거니까 어쩔 수 없다 하면서도 엄니가 불쌍했다.

그 후 거칠어진 엄니를 볼때마다 나는 그런 엄니가 무서워서 그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당시에 라디오에선 파월장병을 부추기는 노래가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그중 가장 귀에 익은 노래는 신나는 군악대 장단에 맞춰 흘러나온 가수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였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이제사 돌아왔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너무나 기다렸네~굳게 닫힌 그입술 무거운 그 철모 웃으며 돌아왔네 어린 동생 반기며 그 품에 안겼네 ♫♪♩~생략~`이다.

가수 김추자
가수 김추자

월남파병은 1965년에 시작되어 1973년까지 45,000여 명에 이른다. 한국군을 독려하기 위해 맹호부대 백마부대 등 여러 노래가 나왔다. 그 중에 가장 귀에 익숙한 노래는 ‘백마부대 용사들‘이다.

아느냐↗ 그 이~름 무적↺의 사나이- 세운 공도 찬란한 백마고지 용사들~ 정~의의 십자군 깃발을 높이 들고↗ 백~마가 가는 곳에 정의가 있다↘달려간다,↗ 백마는 월남 땅으로~~ 이↺기↺고 돌아오라 대한의 용사들 ↗↗~~♬♫ 아느냐 그 이름 역전의 사나이 그 이름도 찬란한 백마고지 용사들 ~~중략~~백마가 가는 곳에 자유가 있다 ~~~중략~~~♬♫♬♫

혁신과 창조를 외치는 사람들은 종종 문제와 고민이 창조의 시작점이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나이제나 문제는 분명하게 있는데 답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내가 열세 살인 1969년 역전도 그런 상황이다. 아침 저자가 11시 쯤 끝나면 저녁까지 시간이 눌눌하니 국수도 팔기로 했다. 장사라는 게 손님이 있을 때도 있지만 손님이 너무 없는 경우도 많다. 장사가 갖는 막연함 막막함 이상함이 나는 정말 싫었다.

시장이 열리지 않는 장날이면 밥 막걸리 국수 어느 것 하나도 팔지를 못한 날이다. 하필이면 그런 날 연필 한 자루 주면서 밥과 막걸리를 달라는 안면이 있는 연필장사 거지가 찾아온다. 어떤 지게꾼 아저씨는 한 번도 빤 적이 없는 새카만 옷 한 벌에 떼가 잔뜩 낀 모자를 쓰고 배가 고프면 문 옆에 그냥 하루 종일 서있다. 비가와도 비를 맞고서 말이다. 밥을 달라는 말 한 마디도 없이 그냥 서있다. 장사가 잘 되는 날은 그냥 국에 밥을 말아서 주면 후다닥 먹고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사라진다. 그런 경우가 많아서 엄니는 그 지게꾼을 ‘우두거니’란 별명을 붙여줬다.

가수 김상희
가수 김상희

부모도 없이 누나 동생 함께 무작정 들어와서 배고프다고 우는 어린 아이들 거지, 무일푼으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국수 한 그릇 달라고 애원한다. 약간 정신이 오락가락한 사람들이 배고프다고 식당 앞에서 막 운다. 밥이든 막걸리나 국수든 마시라도 했고 몇 그릇이라도 팔았으면 다 먹자고 사는 인생이니까 뭐라도 주고 싶다. 뭔가 팔아야 나머지 못 판 것을 식량으로 하고 판 돈으로 재료를 구해서 내일 장사를 해야 했다. ‘한나도’ 팔지 못했는데 동냥을 오면 ’줄 수도 안 줄 수도 없는 이상한 상황‘을 맞이하며 하루하루를 보내 적도 있다. 그런 날을 보내고 아침이면 또 오늘은 손님이 많이 오겠지~~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1969년 여름, 그 시절 어김없이 아침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는 가수 김상희의 ’대머리총각’이다.

여덟시 통근 길에 대머리총~각 오늘도 만나려나 떨리는 마음 시원한 대머리에 나이가 들어 행여나 장가갔~나 근심하였죠 여덟시 통근 길에 대머리 총각 내일도 만나려나 기다려지네 ♫♪♩~생략~`이다. 당시 김상희 의 간드러지고 찰지고 힘있는 목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2020.2.1. 2:2 강길봉


강길봉

강길봉 박사
강길봉 박사

약력:
* 순천 태생, 순천매산고/단국대 법대(5.16 장학생)/고려대 대학원 졸(행정학석사/박사)
* 고시학원 강의(종로/노량진/신림동 24년)
* 고려대, 서울시립대, 행정안전부, 광운대 강의(외래/겸임/강의전담교수)
* 최신행정학(육서당,2000, 20판), 최신행정학(새롬, 15판) 행정학개론(21세기사,2019), 외 저서 및 논문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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