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 강길봉
  • 승인 2020.02.15 14: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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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추억에 기대어 영그는가 (#5)

상급반 중 4학년보다 5학년은 학교생활이 더 길다. 오후 한두 시간까지 길어진 학교생활로 역전친구들과 주중에 거의 놀지 못했다. 다만 반공일(半空日)이나 일요일에는 가능했다. 문제는 노는 장소였다. 이삼 년 전과 달리 열차 이용객들이 부쩍 늘어서 역전광장에서 노는 것이 어려웠다.

새로운 놀이터가 풍덕동에 있는 비행기 공장이다. 비행기 활주로(滑走路)는 지금 역전교차로 중심축에서 역전시장을 지나 풍덕주공아파트까지 한 500미터 정도이다. 그 공장은 조선인 강제노역으로 일제(日帝) 시대 만들었지만 폭격을 받아 폐허가 된 터이다. 길이는 현재 ‘금호아파트’ 그 옆 ‘풍덕주공아파트’ ‘하나로탁구장’ ‘영일식당’까지 150미터가 넘고 남교 운동장보다 더 길다. 폭은 6-70 미터 쯤 된다. 수십 개의 철근 콘크리트 기둥, 높이는 2미터가 넘고 폭도 사람 서너 명이 다닐 수 있을 만큼의 수십 개 굴(窟)이 있었다.

당시 강제노역에 동원된 어르신의 얘기로는 ‘전투비행기 조립공장‘이라 들었다. 더운 여름에는 시원했고 겨울에는 바람을 차단할 수 있어서 춥지는 않았다. 굴속에서 숨바꼭질도 하고 도둑놈 잡기도 했는데 어쩌다 혼자 굴속에 남게 될 때는 소름이 쫘아악~ 돋을 만큼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 슬프고 음산한 분위기에서 가슴을 잔잔하게 울리면서 뭔가를 생각하게 하는 노래가 있다. 펄시스터즈의 ’떠나야할 그 사람‘이다.

떠나야 할~~~ 그 사람 잊지 못할 그대여~ 하고 싶은 그 말을 다 못하고 헤어져↗사무친 이 가슴~ 나혼자~ 나↺혼자서↗ 숨길수↺ 없어요 숨길수 없어요↺ ~중략~ 보내야할 내 마음 잊어야 할 내 마음 맺지 못 할 그 사람 눈물만이 가득해~ 사무친 이 가슴~중략~~ 숨길 수 없어요 숨길 수없어요♫♬♫

2016년 드라마 <시그널, 주연 김혜수 이제훈 조진웅)의 배경음악으로 깔린 이 노래를 들으며 행복했던 기억이 지금도 아련하다. 지금도 여전히 <시그널2>를 기대하고 있다.

영화 시그널
영화 시그널

여름방학은 만성리 해수욕장이 개장(7월10일)되고나서 며 칠 후에 시작되었다. 방학이라 집안일을 해줘야만 하루 종일 놀기가 편하다. 밥 막걸리 국수까지 파는 저잣거리 간이식당은 새벽 네 시 쯤 문을 연다. 엄니는 새벽마다 시래기국을 끓이고, 그런 중에 막걸리가 두어 박스 배달되고 소쿠리에 식은 밥을 준비하느라 부산스럽다. 나는 가게 문 앞에 생선 장사나 채소장사가 진을 치지 못하게 하고, 손님들이 들어오는데 성가시지 않도록 망을 보는 게 주된 일이다. 손님들이 오면 눈치껏 설거지를 그때마다 쓱싹쓱싹 하는 일이다. 열한 시 정도 지나면 손님들이 확~ 준다. 그러면 국물에 밥 한 덩어리 넣어서 얼른 먹고 “엄마 나 풍덕다리에 몰놀이 갈라요 인자.”하면 “ 이~~~.”한다. 그것으로 엄니와 나의 하루치의 얘기는 끝이다.

순천 풍덕교
순천 풍덕교

한 여름은 거의 하루 종일 개헤엄 깨구락지(개구리) 헤엄 송장헤엄 등 형들이 가르쳐 준 온갖 헤엄을 다 치며 놀았다. 다리 밑 이쪽에서 저쪽 끝에까지 시합도 하고 숨이 헐떡거리면서도 하고 또 했다. 쉬는 시간에는 강가 수초(水草)속에 슬며시 손을 넣고 손가락으로 살짝살짝 건드리면 참붕어가 손가락 끝에 파닥거린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두 손으로 덥석 쥐는 소위 ‘더듬이질’로 붕어나 대피리를 잡고 운빨 좋으면 매기나 장어도 잡았다. 된장 고추장 감자 파 미원(당시 만능 조미료)과 냄비까지 이미 할당되어 다들 가져온 상태이다. 잡은 고기의 배를 따서 내장을 긇어 내고 철사 줄에 줄줄이 꿰어 구워먹기도 하고 냄비에 넣고 탕을 끓여먹으며 출출했던 배를 채웠다. 해가 저물도록 낯바닥이며 등짝이 새까맣게 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풍덕다리 철(鐵)다리 아래 물놀이가 지겨우면 일주일에 꼭 들르는 곳은 만성리 해수욕장이다. 홍익회 옆 철조망에 개구멍을 만들어 놓고 그곳을 통과해서 대한통운 옆으로 해서 기차를 쉽게 올라탈 수 있었다. 신풍역에서 검표인이 다섯 째 칸 쯤 있을 때 이미 검표된 칸으로 옮겨 타면 도둑기차 타는 건 ‘껌‘이였다. 만성리에서 하루 종일 나오는 노래가 하나있다. 그 이후로도 매년마다 계속되었다. 1969년 당시 처음 나온 그 노래, 온 해수욕장을 강타한 그 노래는 키보이스(KEY BOYS)의 ’해변으로 가요‘이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해변으로 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해변으로 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 줘요~~연인들에↗ ↗해변으로 가요 해변으로 가요~↺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해도 말은 안 해도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 거에↺요 불타는 그 입술 처음 느꼈네 사랑의 발자욱 끝없이 남기며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중략~~ ♬♫♬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후, 순천역 대합실 화면에 사람이 나오는 텔레비전(‘TV)’가 설치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1969년 TV수상기 수가 10만대(총인구 3000만 명, 300명 중 1명 꼴)에 이르면서 관공서(정부청사, 철도역 등)에 설치를 의무화했다. 특히 1969년 KBS MBC TBC 방송 3사의 TV 개국 등으로 순천시내 드문드문 가정에도 텔레비전이 들어오게 되었다(조항제, 한국방송의 역사와 전망, 151-200). “종간이 행님, 역전대합실에 TV방송을 한가요.”라고 물었더니 씨익 웃으며 ‘맞어’라고 했다. 다섯 시 반부터 시작한다고 해서 일찌감치 표파는 곳 건너편 TV가 걸려있는 벽면 위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

영화관에서처럼 맨 처음 태극기와 함께 ♬♫동~해~물과 백~ 두~산~이♬♫♬♫나왔다. 어린이 프로인지 몰라도 ‘흑마(Black Horse)’라는 프로였다. 나 또래 미국 어린이가 말을 신나고 타고 들판을 질주하는 모습이 매우 낯설었다. TV를 처음 보면서 프로그램의 내용보다는 어떻게 저기 안에 사람이나 동물들이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의아함과 호기심으로 모든 게 정말 신비스러웠다. 역전 대합실에 TV가 있어서 여름밤은 별다른 걱정거리가 없을 듯 했다.

며칠 후 TV에서 아폴로 11호 우주선이 달에 착륙했다는 영상이 나왔다. 선장(사령관)인 닐 암스트롱(Neil Alden Armstrong), 마이클 콜린스, 에드윈 "버즈" 올드린 3인이다. 특히 암스트롱은 “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라고 말했다. “미국은 참 엄청난 나라다. 어떻게 달나라에도 갈 수 있다니.“ 이상한 무기력증의 독백을 하며 그해 여름은 가고 가을이 왔다. 시민회관을 지나 남문파출소를 지나자 길을 건너 c지구 사는 친구들이 순고 쪽으로 가버리고 혼자서 터벅터벅 나이롱극장이 있는 철길건널목을 지났다.

철길 양쪽으로 끝도 없이 누우런 나락이 거의 다 익어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나이롱극장에 미쳐서 엄니 한테 죽기 직전까지 맞은 걸 생각하고 애써 외면하며 풍덕다리 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논에 줄을 긋듯 코스모스가 하늘거렸다. 대나무숲을 지나 담배가게 앞 안채 마당에 석류(石榴)가 주렁주렁했다. 1969년 그때 가수 정은숙이 처음 부른 노래로서 석류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노래다. 그 노래는 ‘석류의 계절’이다.

밤이~~ 지나고~~ 햇살이 부실 때~~빨↺간↘ 알알이 석류~는 붉는데 차거운 별 아래 웃음이 지면서 메↗마른 가지에 석류 한 송이 가--을은 외로운 석류의 계↷절↘ 그늘 지나고 햇살이 부실 때 빨간 알알이 석류는 붉는데 바람이 차면서 낙엽이 지면서~~생략 ~~♬♫♬♫

그해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서 순천역 대합실에 변화가 왔다. 톹밥 난로를 피우던 넓고 동그란 통을 치우고 길고 사각형의 석탄난로가 들어왔다. 안쪽으로는 도톰하고 꼬리 쪽으로 조금 가는 불가사리 모양의 석탄이었다. 문제는 석탄난로로 교체하는데 그치지 않고 역전저잣거리를 철거하고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저잣거리와 순천역 승객을 기대어 살아가는 식당 여관 가게 주인들이 시청에 문의를 했다. 그런 기획안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언제 그것을 구체화할 것인지, 그것이 구체화되면 시장을 어디로 옮길 것인지, 철거의 순서와 그에 따르는 이주민대책과 보상 문제 등은 아직 정해진 게 없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주민동의를 얻기보다는 관주도적인 일방통행적 행정이라서 ‘깜깜이‘로 철거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것도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안개 같은 뽀오얀 어수선함 속에서 연말은 다가오고 또 겨울방학을 맞이했다.

당시 5학년 생활기록부상 결석은 가사조력으로 하루이고 성적은 4학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회에서 ’우‘이고 나머지 과목에서 모두 ’미‘를 받았다. 행동발달 사항에서는 “근면하고 침착하며 온순하다. 몸의 균형이 잡혀있고 발육은 좋으나 용의가 단정하지 못하다.”고 적혀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시절 내 고향 순천의 겨울은 눈도 많고 바람도 거셌으며 몹시 추운 날이 많았다. 그 해 1월도 2월 초순 설날에 대한 기대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춥고 배고팠다. 여느 방학 때처럼 장작을 지펴서 시래기국을 펄펄 끓이고 흰쌀이 거의 안 보이는 보리밥을 나실나실하게 했다.

다른 계절에 비해 겨울 역전 저잣거리는 사람이 크게 북적거리지는 않는다. 겨울 방학 때 집안에서 내가 하는 일은 밥 주문이 들어오면 밥상을 날라다 주고 얼마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찾아오는 일이다. 열한 시 이후 식당 일이 거의 끝나면 설거지 한 번 해주고 훌훌 털고 집을 나선다. 중앙초등학교 초입(初入)에 있는 미나리깡에서 썰매를 타고 놀았다. 또 두 편을 갈라서 진 팀 중 한 명이 벽에 기대고 다른 친구가 사타구니 밑에 머리를 박고 남은 친구들이 차례로 궁둥이 밑으로 머리를 처박고 친구 다리나 허리를 단단하게 잡는다.

다른 이긴 팀은 있는 힘을 다해서 좀 더 거세게 뛰어와서 올라탄다. 가위 바위 보를 한 후 이긴 팀이 올라타는 소위 ‘말(뚝?)박기’이다. 겨울에 아이들이 노는 방식은 순천 어느 곳에나 비슷했다. 비행기공장 주변의 넓고 너른 논과 밭 풍덕동 방천길을 따라가며 연 날리기, 골목어귀에서 잣치기 제기차기 팽이돌리기 등이 그러하다. 다만 홍익회 철조망에 뚫어놓은 개구멍으로 들어가서 대한통운에서 흩어진 고철 덩어리를 훔치거나 빼깽이를 빼먹는 행위, 식당과 여관 조바(삐끼)일을 하면서 붕어빵을 사먹거나 영화비를 버는 것은 다른 동네 아이들과는 사뭇 다르다.

80년대 순천역 광장
80년대 순천역 광장

밤 열 시 이후에 내리는 손님들 중 순천에 거주지를 두고 있지 않는 어른들이 있다. 눈치껏 다가가서 “ 안녕하세요. 혹 주무실 거면 다른 여관 여인숙은 50원 하는데, 저의 일등여관은 깨끗하고 편안하면서도 40원에 주무실 수 있어요. 소문이 나서 지금 방이 딱 두 개밖에 남아 있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조금 머뭇거리면 “저가 특별히 구두도 공짜로 닦아 드릴께요.” 그러면 내 머리를 살짝 건드리면서“ 짜아식, 어린 놈이 말도 잘하네. 어디냐?”하고 물으신다.

작은 가방이나 물건을 들어주면서, “쩌어 긴디요. 저를 따라오세요.”하며 하얀 오십환 짜리 은색 동전을 생각하며 신나게 걷는다. 대게 5원(오십환, 여관비의 10%)을 주인아저씨가 준다. 식당도 마찬가지다. 막차가 가까워지는 밤이 되면, 서울대 법대를 나와 검판사 안하고 가수가 더 좋다고 한 가수가 있다. 머리를 짧게 깎고 듬직하게 보이는 가수다. TV나 라디오에서 많이 나오는데, 가수 최희준의 ‘하숙생‘이다.

인생은~~나↗그네 길~어어디서 왔↺다↺가아~어디~로 가~는↺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 인생은 벌거숭이 빈 손으로 왔다가 ~~중략~~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중략~ 강물이 흘러 가듯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1970년 초 겨울방학의 끝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할 무렵, 아직 어느 어둠이 가시지 않는 새벽 여섯 시쯤, 한 손님이 왔다. 엄니 거슬리지 않게 설거지통 옆에 나는 서있었다. 막걸리 한 병을 두어 잔에 채워 다 비우고 시래기 국물을 떠서 드시고 나서 우리 엄니에게 뭐라고 애기를 나누더니 우리 엄니가 피식 웃었다. 나를 흘끗 보는 둥 마는 둥 하시더니 “얼굴도 반반 흐게 생기신 분이 이런 장사를 하면 힘들지 않냐.”고 했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우리 엄니가 “아니 하실 야그가 있으면 딱 까놓고 하시제, 아참부터 더운 밥 먹고 뭔 쉰 소리여.”라고 받아쳤다. “하하~~ 차암 아짐씨, 남 속을 빠삭하게 알아 뿔구마이.” ~ 나를 한참 쳐다보시더니, “짜-를 설거지꾼으로 쓰지 마시고 신문배달을 시키면 어쩌 긋쏘, 나는 ‘국제신보사 순천지국 지국장이요. 사람들은 ’서 기자(徐 記者)‘로 부르요.”라고 소개했다.

내 어깨와 다리를 만져보더니 신문배달을 하기엔 적합이란 듯 흡족해 했다. 신분배달로 주는 월급은 아마 두 분이 합의한 것 같았다. 내 의견을 아랑곳하지 않고 체결된 계약이지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기분이 좋았다. 그날 철도관사->중앙동과 장천동 구역인 전신전화국 앞 길 양쪽주택, 성동교 지나서 합승정류소 길 양쪽, 도립병원과 북교 앞 매곡동까지 부수로 50여 곳 정도의 집 대문과 신문 넣는 곳을 가르쳐 줬다. 그 다음 날부터 새벽에 일어나서 총무 형에게 50부를 받아서 한 시간 내에 북교 앞까지 배달하고 7:00분에 남문파출소 뒤편 총포사 일층 사무실로 와서 배달완료보고를 했다.

넉넉잡고 쉬지 않고 뛰면서 신문을 던지거나 꽂아 넣고 역전에 다시 도착하면 2시간 정도 걸린다. 방학 때야 신문 배달하고 뭔가 엄니에게 큰 일을 하나 한 것처럼 집에 들어가서 설거지도 안 하고 놀 수 있어서 좋았다. 딱 한 달이 지나니 총무가 나오지 않자, 서기자님은 나에게 총무까지 해라며 봉급도 50%나 더 올려준다고 했다. 새벽에 도착하는 열차 차선에서 기다려 신문을 내리고, 대합실로 나와 다른 배달원에게 신문을 배분하고 100부 정도의 수금(收金)을 해오는 것이 총무가 된 이후 추가된 업무였다.

월요일은 빼고 매일 아침 새벽 일찍 일어나서 신문배달을 하면서 하루하루 정신없이 지나가고 6학년 개학을 하게 됐다. 교실 건물은 학교 정문을 바라보는 2층 건물에 6학년 아홉 반 모두 배정되었다. 나는 6학년 4반이고 담임은 순고 뒤 개울가 쪽 기와집에 사시는 5촌 당숙이다. 호랑이 선생님으로 소문난 강 영호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이 첫 말씀은 “내가 호랑이 선생으로 소문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니들은 ’뺑뺑이‘를 돌려 중학교를 가는 녀석이므로 엄하게 하지 않을 것이니 너무 무서워하지 마라.”고 하셨다. 바짝 쫄고 있었는데 그 말씀을 들으니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되어 안심이 되었다.

아침에 두 시간 가량 신문을 돌리고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입에 그냥 퍼서 넣고 역전에서 30분 넘게 다시 걸어서 학교까지 갔다. 매일 오고가고 반복되는 하루하루라서 몸은 몹시 피곤했다. 하지만 수업시간에는 졸지 않고 까불지도 않고 착실하고 얌전하게 출석하고 수업을 들었다. 70명이나 되는 반 친구들 중 나보다 성적이 뒤처진 사람은 60명 정도 되었다. 여전히 수업료 육성회비의 면제 무상급식 무상교재의 혜택을 누리며 6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얼마 후 신문사 사무실을 옮겼다. 맘모스 극장 앞 2층 건물이다.

극장 정문을 마주보고 나있는 계단을 오르면 30여 평의 흥국생명 사무소가 있고 그 바로 오른쪽 10여평이 국제신보 사무실이다. 어느 날부터 책보(冊褓, books wrapping cloth)를 아예 사무실에 두고 새벽에 신문배달하고 사무실 들러 책보만 가지고 학교에 가는 꼼수를 부렸다. 가끔 옆 사무실에 들러서 인사도 드리고 심부름도 해줬더니 누나들과 친해졌다. 수시로 밥 먹어라 간식 먹어라 하는 통해 그 시절은 무릉도원에 사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사시는지 모르지만 보험회사 누나(당시 22살, 나보다 8살 위)가 좋아했던(혼자 있을 때 내 사무실까지 노랫소리가 들렸던 노래) 노래가 있다. 가수 박인수의 ’봄비’다.

이슬비 나리는 길을 걸으며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고~~ 외로운 가슴을 달랠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 없이 흐르네 봄↺비~~~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나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 ♬♬ ~이하 생략 ~~

가수 박 인수는 현재(2020.2.13.) 병원에서 많이 아파 입원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영혼이 깃든 그분의 노래에 감사드리며 쾌유를 빌어본다.

2020.2.15.0:45 강길봉 드림


강길봉

강길봉 박사
강길봉 박사

약력:
* 순천 태생, 순천매산고/단국대 법대(5.16 장학생)/고려대 대학원 졸(행정학석사/박사)
* 고시학원 강의(종로/노량진/신림동 24년)
* 고려대, 서울시립대, 행정안전부, 광운대 강의(외래/겸임/강의전담교수)
* 최신행정학(육서당,2000, 20판), 최신행정학(새롬, 15판) 행정학개론(21세기사,2019), 외 저서 및 논문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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