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 강길봉
  • 승인 2020.02.2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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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추억에 기대어 영그는가 (#6)

국제신보 순천 지부장(서기자)은 마치 젊은 시절 씨름 선수였던 것처럼 등치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반면에 사모님은 그분과 정반대의 몸체로서 늘 비실거리고 신경질적이며 아팠다. 기자님댁은 아들 없이 딸만 셋인데 큰 딸은 나와 비슷한 또래이고 그 아래 두서 살 터울 딸들이 있다. 집은 중앙교회 정문 앞 또랑을 낀 일층 토담집이었다.

만성리 (출처:https://windhill.tistory.com/329)
만성리 (출처:https://windhill.tistory.com/329)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7월 중순 어느 날 지부장님은 우리 집에 와서 월급을 엄니에게 주면서 만성리 해수욕장에서 사오 일 데리고 있겠다고 허락을 받았다. 가끔씩 도둑열차를 타고 만성리를 당일치기로 갔다 온 적은 많지만 밤을 세워서 그것도 사나흘 씩이나 집을 나가 산 적이 없기에 다소 흥분되었다. 만성리 검은 모래가 수북한 그 바닷가에서 낯은 물론이고 밤새 파도가 오고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 볼 수 있다니 기분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들떴다. 지부장님과 텐트를 치고 만성리 역을 몇 차례 왔다갔다 하면서 짐을 들어다가 텐트에 갖다 놓는 일, 때때로 필요한 물을 해수욕장 뒤쪽 민가(民家)에서 길어오는 일, 일수(日收)찍는 것도 아니고 하루 세 끼 밥을 짓는 일, 이것저것 허드렛일을 했다.

그래도 어두운 밤바다를 오랫동안 지켜보는 쓸쓸함과 외로움, 파도가 들어오고 나가는 신비스러운 밤 풍경, 수없이 쌓고 또 쌓아도 밀물에 스러지는 모래성들, 저 멀리서 나보다 더 심각하게 파도를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사람들, 새벽 서너 시가 되면 갑자기 오는 적막감, 혼자만이 오로지 저 기약 없는 망망한 세계를 지켜보고 있다는 자부심 등 온갖 상념에 젖어들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가끔 지부장 둘째 딸이 자기 엄니의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동그랗고 크고 맑으면서 웃음기 가득한 눈을 지그시 감으며 얼굴을 좌우로 흔들면서 부른 노래가 생각난다. 딸 중에는 인물이 제일인 것 같은 그 녀석은 분명 쥐띠(1960년생)이다. 당시 영화를 보고 ‘뽕~’갔다나~. 텐트 앞 검고 뜨거운 모래 위에서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지금 환갑이 되었을 법한 그 아이(서미애? 불확실하지만)가 멋지게 불렀던 노래는 가수 양미란의 ‘범띠 아가씨‘이다.

가시내~야~ 가시내~야~ 범띠 가시내~야 여필종~부~ 좋아하다 멍든 멍든~ 사~내~들 울고 가는 사내들도 한심~하~다~만 돌아서면 그리워~라 범띠~ 가시내 가시내~야~ 가시내~야~범띠 가~시내야 멋쟁이~로~ 살고 싶~은~ 범띠~ 가~시~내 ♬♫ ♬

 그때 큰 딸과 지부장님이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평소에 혼자 신문사 사무실에서 있을 때 노래를 많이 불렀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도 한 자리 불러보라고 하셨다. 며칠 동안 엄니도 못 봤고 이모 집에 간 누나와 송강 고모집에 가서 통~만나지 못했던 형이 생각났다. 그래서 학교에서 배웠던 동요 ‘얼굴’(1967년 초등학교 두 교사가 작사작곡)을 불렀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중략~~무지개 따라 올라갔던 오색빛 하늘 나래♬♫ ~~중략~~구름 속에 나비처럼 나르던 지난 날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곤 하는 얼굴♬♫♬♫

 노래를 부르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서럽고 목이 메여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서 기자님은 “짜식 어린 놈이 머언 사연이 그리도 많냐~ 짠 하다.”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도 ‘얼굴‘이라는 노래는 마음으로만 불러도 목이 메인다. 누구에게나 알고 있어도 차마 부르지 못한 노래 한두 개는 있을 것이다. '얼굴'은 나에게 그런 노래로 남아있다. 해수욕장에 온지 이틀 동안에는 검은 모래가 발은 데일 듯 따가웠다. 등껍질에 그스름이 있는 듯 새까맣게 탔다. 셋째 날엔 온종일 비가 내렸다. 바람 불고 비가 하루 종일 오는 해수욕장은 춥고 스산했다. 나머지 이삼 일은 뜨거운 여름날이었고 주말이라 사람이 미어터질 듯 많았다.


낭만적인 바닷가 추억을 꿈꿨으나 상 머슴 노릇만 한 것 같아서 당시는 기분이 언짢은 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칠흑 같은 깜깜한 바다 한가운데서 달빛에 아른거리는 포말(泡沫, Froth)을 밤새도록 볼 수 있었다. 끊임없이 오고가는 파도를 들보면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파도는 영원한데 파도소리를 듣던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는 슬픈 숙명 같은 것을 느꼈다. 평생 잊을 수가 없는 슬픈 생각들 그것이 오늘날까지 나를 애상적 감상주의자로 만들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가을운동회를 위해 반별 축구 배구 씨름 달리기 등 종목별로 반 친구들을 선발을 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씨름 시합에 나가라고 했다. 씨름보다는 100미터 달리기를 나가겠다고 했더니, 니 아버지가 상인제동에서 옛날 힘 좀 쓰신 분이라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반별 씨름 예선전을 하는데 두 번 째 친구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선생님이 “짜아식! 하고, 피식 웃었다.” 당숙이라 나에게 무서운 듯 잘해주셨기에 “그러니까 100미터 단거리나 200미터 계주(繼走)한다고 했잖아요.”하고 대들었다. 학교생활 6년 만에 그것도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감히 선생님에게 말대꾸를 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선생님도 문중(門中)을 의식해서 인지 별 다른 반응을 하지 않으셨다.


 아침에 신문배달을 2시간 동안 하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학교에 오는 날이 길어질수록 몸에 이상한 변화가 왔다. 월요일 날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국민의례를 할 때면, 운동장 온 사방이 짙은 안개에 싸인 듯 부~옇게 보였다. ‘땡키벌’을 외치시던 교장선생님 말씀도 먼데서 들리는 듯 귓가에 멍~멍~하게 들렸다. 서있을 수가 없어서 가만히 주저앉은 경우가 많아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부~연 안개는 걷히고 선생님 말씀도 점차 크게 들리고 옆에 있는 친구들 눈코입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염소나 ‘토깽이(토끼)’ 같은 초식동물도 아니면서 매일 시래기 국에 밥 한 덩이 말아서 입에 퍼넣 듯 끼니를 때웠다.

점심 도시락을 한 번도 싸간 적이 없고 오로지 학교 무상급식에만 의존했다. 정 배가 고프면 수돗물을 콸콸 마셨다. 누구나 살다보면 어느 한 땐, 세 끼가 아닌 두 끼니 먹는 것도 사치(奢侈)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때가 나의 삶에서 아마 그런 시절이었는가 보다. 하지만 방학 때는 서있을 수가 없거나 식은땀이 나고 사방이 안개로 부연 경우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영양실조에 의한 현기증이다. 현기증이 사라질 즈음 성큼 왔던 그 해 가을이 떠나간다. 그 시절 흑백 TV에서 요즘 말로 꽃미남 가수가 등장했다. 그의 ‘웨딩드레스’도 좋아했지만 나는 다른 노래가 더 마음에 들었다. 가수 한상일의 ‘애모의 노래’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게~ 꿈같은 구↺름타고 천사가 미소를 짓는 지평선을 나르네 구만리~ 사랑 길을 찾↺아 헤매는 그대는 아~는가 나의 넋을↗ 나↷는 짝 잃은 원앙새~나는 슬픔에 잠긴다. ~~중략 ~~♫♬♫

그렇게 가을이 가고 추운 겨울이 오면서 역전저잣거리 철거가 시작되었다. 지금역전교차로 풍향계가 있는 자리가 옛날저잣거리 한복판이고 그곳에 양화열 형님집이다. 그 벽돌과 나무판대기 집이 헐어지면서 저잣거리는 거의 철거가 완료되었다. 1970년 12월이고 현재 역전시장 상가건물은 1973년 말에 완공되어 1974년부터 입주가 시작되었다. 역전시장이 시청에 공식적인 인허가절차가 그 후에 이루어진 것은 1975년도이고 번영회 1회 회장을 당시 전매청에 다니시던 정ㅇㅇ 어르신이 맡았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인 1971년 역전시장은 광활하게 텅 ~빈 광장이었다. 여수 쪽 길로 당시 대흥연탄공장 정문 건너편까지 생선장이 열렸다. 역전교차로 한복판에서 풍덕다리와 장대다리 비행기공장 세 방향의 길가로 과일 채소장이 길 따라 즐비하게 들어섰다.

80년대 순천역 광장 (출처:전남 소상공인 상생 협동조합 블로그)
80년대 순천역 광장 (출처:전남 소상공인 상생 협동조합 블로그)

 저잣거리에서 점포를 갖고 있거나 무허가이지만 오랫동안 땅을 점유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이전(移轉)에 따른 어떤 식의 보상을 해주었다. 당시는 시(市)에서 하는 일에 왈가왈부(曰可曰否)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어서 주민들은 큰 저항을 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니 선처(善處)해주고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신 봄에 하는 것이 좀 어떻겠냐고 시청에 간청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내년 봄으로 미뤄달라는 요구는 거절당했다.

 지금 역전거리 교차로 5차선이 만나는 한복판과 차량이 우회/좌회하는 공간 모두가 1950년 중반부터 1970년 12월까지 역전 저잣거리와 식당 상가가 있었다. 합승정류소 앞 몇 개의 점포를 제외하고는 순천역과 지금 농협 건물 사이는 텅~~비었다. 순천역을 바라보며 역전농협(그때는 공터 천막) 좌우로 즐비하게 임시 막사를 짓고 장사를 했다. 임시막사에서 장사를 할 수 있는 기간은 지금 역전시장 자리에 철거민을 위해 지상 2층의 건물을 완공할 때까지 만이다. 엄니는 군인용 막사를 시청에서 대여 받아 시장 상인이 아닌 열차를 타고내리는 여객손님을 대상으로 주로 백반 막걸리 국수장사를 했다.


 시내버스인 합승을 제외하면 별다른 차량이 없었던 빈 공터에 눈이라도 내리면 딴 세상에 온 것처럼 신비롭기까지 했다. 비가 내리고 천둥번개가 치는 날이면 온천지가 난리를 치는 것 같았다. 그때 우리 옆 막사(幕舍)에는 머리가 희끗한 육십은 되어 보이는 부부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20대 후반의 아들이 살았다. 그 분들은 마치 스님들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읊듯 아침저녁으로 수없이 똑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내가 살면서 처음 들은 두 분이 읊조리는 말은 ‘남녀호랑개교~~남녀호랭개교~~“였다. 그분들은 끊임없이 라디오를 켠 채로 장사를 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육이오 때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그냥 순천에 눌러 앉게 되었다고 한다. 카세트 겸용인 라디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노래는 가수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중략~♬♫♬♫

나는 지금도 장사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다. 그것은 어릴 때 겪었던 경험 때문으로 본다. 식당 여관 가게 등의 장사(do business)는 언제 얼마나 손님이 올지 정해진 것이 전혀 없다. 아직도 기억이 선~한 것은 겨울에 열차가 들어올 때마다 그 넓고 광활한 역전광장과 교차로에 손님들이 끊임없이 가고 온다. 손님이 오나 두 눈 빠지게 광장만 바라보고 있는데 새벽에 나와서 오후 한 두 시까지 손님이 한 명도 없을 때도 있다. ’시장통‘을 다 드러낸 그 넓은 역전광장에 눈발은 날리고 새벽에 끓여 만들어 놓은 국수타래는 수북하고 쌓여있다.

국수 국물 안에 오뎅들도 쫄깃함을 잃고 부르트고 있다. 백반이든 스무 병씩 든 막걸리 두 박스도 그대로다. 조바심에 막사 입구에 아예 서서 열차에서 내리는 손님들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하도 손님이 없어서 이웃 식당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녀 봐도 마찬가지다. 엄니는 한숨만 쉬고 아무 말이 없다. 내가 더 조바심이 나서 “엄니 우리 뭐 묵고 산당가, 이렇게 손님이 없는디.”하고 엄니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란 법은 없제. 안 팔리면 우리가 다 묵어야제. 먹는 게 남는 거 아니냐.”하시며 멎적어 했다. 참다못해 내가 “엄니 나가 손님 잡아 올랑께 걱정 말고 기다리소 이.”하고 나간다. 열차가 들어 올 때마다 하차(下車)한 사람들에게 “저희 집 국수가 쫄깃쫄깃하고 멸치 국물도 겁나게 끝내줍니다. 국수 드시면 저가 구두는 공짜로 닦아드립니다. 침 안 묻히고 라이터로 사알짝 그슬려 광(光,shine shoes) 내서 마치 새로 산 구두처럼 만들어 드릴께요. 저희 국수집은 쩌그 가운데입니다”라고 요즘말로 삐끼 노릇을 해서 몇몇 모시고 온다. 그 손님들이 가실 때는 웬만한 짐은 차 타는 데까지 들어준다.


 학교를 졸업하고 연구원 고시학원 대학교 등 35년 넘게 살아오면서 수강생과 대학생 등 고객에게 공손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응대하는 것은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학생들과 1대1의 대면관계를 통해 좀 친해진 경우를 제외하고 20세의 학생들에게 약 존칭을 쓰고 있다.

 터전을 잃은 역전 사람들이 동그란 연탄난로 식탁(食卓)에 빙~둘러앉아서 막걸리 한 사발에 불러 재끼는 노래가 참 구슬펐다. 당시 인기 였던 가수 김상진의 ’이정표없는 거리’다.

이리~~가면 고향이↺↺요 저↗리가면 타향이이이인데~데 이정표 없↺는 거리 헤메도는 삼거리길↘ 이리갈까↗ 저리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세~갈래길 삼거리에 비가 내리리이인~다. 바로가면 경상도길 돌아가면 전라도길이정표 없는 거리 저리가면 충청도 길 와도 그만 가도 그만 반겨줄 사람없고 세~~갈래길 삼거리에 해가 저~문다♫ ♬♫

순천역 대합실에 놓인 석탄난로에 불가사리 모양의 석탄이 타닥타닥 타서 흰 재가 되듯이 나의 초등학교 6년도 사그라졌다. 1971년 2월 6일, 비는 오지 않았지만 구름이 잔뜩 낀 날이다. 5학년 여학생이 송사를 하고 6학년 친구가 답사를 하고 상장수여가 있고 교장선생님 말씀이 이어졌다. 그리고 학교정문으로 나오는데 4-5학년 후배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해주었다. 친구들은 엄니 아버지 형제들이 와서 함께 사진을 찍고 웅성거렸다. 졸업식인데 당연히 엄니는 나오지 않았고 서운 하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참으로 막막하고 슬플 때가 많았다. 학교가 파할 때 비가 오면 학부모들이 우산을 들고 교실 밖 유리창 너머에 서 있거나 복도에서 기다린다. 그러한 광경을 뒤로 하고 억수 같은 비를 맞고 역전까지 걸어가는 것은 당연했기 때문이다.


 장사가 안 되는 거 뻔히 알면서 끼니를 다 먹을 수도 없는 형편인데 중학교 가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 내 인생에서 학교는 여기서 끝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났고 “친구들도 이제 만날 수 없구나.”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얼굴에 어디서 처운 눈물 자국이 있는 것 같았다. 어디서 처 울고 오면 성질부터 내고 또 때리는 엄니 성질을 아는 지라 역전에 도착하자 커브 길에 있는 광자 누나 나무대문집에 들어가서 바가지로 물을 떠서 얼굴을 씻었다. 아무 일이 없는 듯 천막으로 들어갔다. “엄니, 졸업했네. 졸업장도 주고 정근상장도 주대. 상장이 두 개랑께. 국제신보 서기자님이 중학교 못가면 총무 위에 과장도 시켜준다고 했응께. 나 때문에 인생 포기하지마소. 알았는가” 엄니는 말이 없었다. “짜아식 뭣도 모르면서 주둥아리만 나락도 아닌 것이 어믄데 여물어젔그만. 국수 묵을 거여 밥 먹을 거여.” “나 오늘은 제대로 괴(고)기에 밥 묵고 잡네. 고기 사줄랑가. 졸업 했씅께.~~”

 중학교 진학을 포기(抛棄)한 채, 아침 신문을 돌리고 막연한 불안감과 겸연쩍음에 친구들과 싸돌아다니며 놀았다. 대성학원 앞 찬일이네 벽돌공장으로 건너가서 시민회관 쪽으로 쭉~ 걸어오다 보면 거치른 나무를 곱게 대패질해서 깔끔하게 만드는 목공소가 있다. 거기 시다로 들어가서 그 일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구두닦기를 할까 이런저런 답도 없는 고민에 휩싸이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졸업을 하고 며칠이 자났다. 강영호 선생님이 자전거를 타고 천막에 찾아왔다. “아짐씨, 오랜만이요. 언제 보고 안 봤는지 통 감이 없소이.” “아이고 새끼를 맡겨놓고 영~딴 년처럼 살아부렀소이. 죄송허구만요.” ”바쁜 세상 다 그렇게 사요. 아짐씨.“ “ 아니, 어쩐 일이당가요.” “아 다른 게 아니고, 우리 반 61명 중 다 중학교 간다고 신청을 했는디, 길봉이만 신청을 안 해서 왔당께요.” “우리 형편이 이런 디요. 어떻게 방법이 있어야지요.” “길봉이 요놈이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중학교 갈 수 없다고 낙심해서 학교서도 기죽어 지냅디다. 공부 머리가 있으니 아짐씨가 힘들어도 이놈을 가르치는 게 좋다고 생각혀요.” “말씀은 감사한데요. 근디 사는 게 힘드네요.” “요놈이 전혀 공부를 안 해도 61명 중 9등이니 공부 싹수는 있소. 힘들어도 이놈 밀어주시오.” 마치 자기 아들 일인 냥 선생님은 부탁에 또 부탁을 했다. 나는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의 가슴에 따신 온천수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또 목이 메여왔다. 울지 않을려고 위아래 입술을 앙다물었다. 숨이 가파 왔다. ‘후우~ 후우~’ 어린 놈이 싸가지 없이 한숨을 내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당숙이자 6학년 담임 선생님은 큰 키에 약간 검고 마른 얼굴, 광대뼈가 살짝 나왔고 검은 눈썹, 수북하고 검은 머리털 흰누런 바바리 코트,  멋진 신사~ 선생님. 마치 홍콩배우 양가휘 같다. 지금도 정확히 50년 전 그때가 새롭다. 6년의 가방 끈을 9년으로 이어주시던 눈물겹게 고마운 선생님이시다.


한 사람의 인생은 이렇게 수많은 징검다리를 만나고 고맙게 내민 손을 잡고 건너면서 노래처럼 영글어간다. 김봉연 선생님! 강영호 선생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며칠을 고민한 엄니는 “죽든지 살든지 해보자.” 세상에나! 엄니가 나를 중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나는 당당하고 늠름하고 세상부러울 것 없는 잘난 놈이 되어 ‘뺑뺑이‘를 돌리러 내 모교이고 유년시절의 고향인 남초등학교에 다시 갔다.

 그동안 감사했나이다. 초등학교 6년까지 ~~ '노래는 추억에 기대어 영그는가' 끝내겠습니다. 2020.2.22.0:45 강길봉 드림


강길봉

강길봉 박사
강길봉 박사

약력:
* 순천 태생, 순천매산고/단국대 법대(5.16 장학생)/고려대 대학원 졸(행정학석사/박사)
* 고시학원 강의(종로/노량진/신림동 24년)
* 고려대, 서울시립대, 행정안전부, 광운대 강의(외래/겸임/강의전담교수)
* 최신행정학(육서당,2000, 20판), 최신행정학(새롬, 15판) 행정학개론(21세기사,2019), 외 저서 및 논문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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