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경이의 그림이야기]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
[가경이의 그림이야기]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
  • 이가경 기자
  • 승인 2019.02.01 17: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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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태평성세(太平聖世)를 염원하다
(전시회기간: 2019.01.04 ~ 2019.02.10)

三國志演義圖 삼국지연의도
태평성세太平聖世를 염원하다

강서구에 있는 겸재정선미술관에서 개관 10주년 기념 특별전시회가 열리고있다.


《삼국지연의도》
전시회제목으로는 평범해보이지 않는데 <태평성세를 염원하다>라는 부제는 더욱 예사릅지 않아 보인다.
삼국지연의도와 태평성세가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걸까?

제1기획전시관 입구
제1기획전시관 입구

제1기획전시관 입구
채용신의 삼국지연의도 8점을 한데 모아서 보여준다.
원래는 10점이었는데 2점의 행방은 알 수 없다.

제1기획전시관입구
제1기획전시관입구

전시관 안으로 들어서면 다시 마주하게 되는 전시 제목 그리고 부제 그리고 조선민화박물관에서 대여하여 차례로 전시되어 있는 그림 8점 그런데 이 그림들이 신앙화로 분류되어 있다.
내게는 그저 재미있는 소설의 주인공일 뿐인 관우가 누군가에게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한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군대가 오면서 관우신앙도 함께 들어왔다.
명나라 장수 진린이 울산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고 치료하면서 남대문 밖 자신의 거처 후원에 관우사당을 만들었다.
이후 다른 장수들도 자신의 주둔지역에 관우의 사당을 지었으며 임란이 끝난후 명나라 황제 신종이 기금을 보내면서 까지 관우의 사당을 지을 것을 요청하여 지금의 동묘인 동관왕묘를 짓게 되었고 그렇게 운장 관우는 이땅의 무신(武神) 즉 승리의신 전쟁의 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원래 무신이었던 치우천왕은 기억속에서마저 멀어져갔다.
평화가 계속되면서 미신이라고 소홀히 여겨지기도 하던 관우가 고종황제 시절 다시 부활한다.
기존의 관왕묘인 남묘 동묘에 이어 서묘와 북묘 등도 지어졌는데 불행히도 얼마지나지 않아 동묘로 합사되거나 없어진다.
여기 걸린 그림들은 전주 남고산성 안에 있는 관왕묘에 걸려있던 그림들이라고 한다.

전시를 둘러보면서 눈여겨 볼 몇가지 팁이 있다.
먼저 모든 그림은 내용에 적합한 제목이 붙어있다.
그뿐아니라 편액도 걸려있었다.

편액
편액

(도록에서촬영)
그리고 인물묘사다.
채용신은 구한말의 훌륭한 초상화가이다.
그래서 그의 인물묘사는 세세하고 뛰어나다.
보통 주인공의 인물은 잘 그리더라도 많은 인물이 등장할 때는 대충 그리기 쉽다 하지만 이 그림들에서는 인물 하나하나가 그 얼굴이 다르고 표정까지 세세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이 그림들에 나오는 의상 인물 기물 풍경등이 아주 조선적이다.
중국소설속 인물을 묘사하므로 최대한 중국식으로 그리려는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채용신은 반대다.
가능한한 모든 것을 조선의 것으로 표현하려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또 하나 부감법의 사용이다.
새가 멀리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그런 시점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 얘기를 했더니 관람객중에서 '조감법'과 어떻게 다르냐고 질문을 했다.
일단 조감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감도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시점을 적용하지만 이 그림들은 다시점 방식이다 그래서 표현이 좀 더 입체적이고 빛의 방향이 표시되지 않아 음영표현은 있어도 그림자가 지지 않는다.
내 생각은 그렇다고 답변했다.

재우마소고천지(宰牛馬昭告天地)
재우마소고천지

宰牛馬昭告天地(재우마소고천지)

우리가 도원결의로 잘 알고 있는 장면이다.
누상촌의 복숭아 밭에서 검은 소와 흰말을 제물로 바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다.
비록 태어나기는 제각각이지만 함께 죽을 수 있게 해달라며 형제의 의를 맺고 결의를 다지는 장면이다.
복숭아꽃이 피어 있고 나무들도 너무나 낯익은 정겨운 모습이다.
검은소가 좀 낯설긴하다.
하지만 예전에 좀 더 종의 다양성이 풍부했던 시절에 이 땅에도 흑우가 있었다.
그리고 백마와 강렬한 대비를 이루기 위한 연출인지 소설속 설정이 그렇게 되어 있다.

삼고초려
삼고초려

三顧草慮(삼고초려)
낯익은 표현일 거다.
유비가 제갈량을 세번 찾아가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데서 나온 말로 유능한 인재를 모셔 오기 위해 공들일 때 쓰는 표현이다.
심지어 세번째는 목욕재계하고 찾아가 낮잠자는 제갈공명이 깰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이 그림을 잘 보면 학이 많이 등장한다.
마당에서 학이 노닐고 공명선생은 학창의를 입고 학우선(鶴羽扇:학의 깃털로 만든 부채)을 들고 있다.
이는 속세의 경지를 넘어선 신선의 세계를 암시하는 것으로 공명선생의 지략이 인간세계의 그 것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
이미 얘기가 잘 되어 지도를 펴 놓고 천하삼분지계(촉나라가 힘이 약하므로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서로 경쟁하게하고 그 틈에 힘을 키워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계책)를 얘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또 관람객이 이 초막이 조선적이지 않다고 했다.
당연히 조선적이지 않다.
초가집을 저렇게 높게 짓지 않는다.
담장도 너무 높다.
사실적이기 보다 공명을 높이는 장치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비교를 할 때 중국의 초가보다 조선의 초가에 더 많이 가까우면 조선적으로 보아야하지 않을까?
상대적으로 보아야한다.
우리 기억속에 존재하거나 민속촌에 박제된 60년대 말 70년대 초의 초가집만 생각한다면 닮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흙담장 위에 짚을 이어 얹어 놓은 모습이나 초가 지붕을 이은 모습 등이 낯익은 우리 방식이 틀림없다.

자룡단기구주
자룡단기구주

子龍單騎救主(자룡단기구주)
조자룡이 혼자 말을 타고 가서 주인을 구해 온다는 뜻이다.
말 위에 있는 장수가 조자룡이고 잘 보면 그의 허리춤에 아기의 얼굴이 보인다.
이 아이가 유비의 아들 아두이다.
그는 나중에 2대 황제가 된 유선이다.
용맹한 자룡이 검을 휘두르고 있고 군사들은 원을 그리며 멀리 떨어져 있다.
그의 용맹함에 누구도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있고 조조는 자룡의 뛰어나 무술과 용맹에 감탄하여 사로잡고 싶어한다.
조조의 용감한 장수인 종진 종신 형제는 땅에 나뒹굴고 있는데 왼쪽 목이 잘린 장수가 종신이다.
전체적인 장면은 마치 이들이 무대 위에 있고 자룡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런 모습이다.

공명기동남풍
공명기동남풍

孔明祈東南風(공명기동남풍)
공명이 동남풍이 불기를 기도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공명은 왜 동남풍이 불기를 기도했을까.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손권의 오나라와 조조의 위나라가 위치하고있다.
조조가 오나라를 공격하려면 이 강을 건너야하는데 위나라의 철기군은 육지에서는 강하지만 수전에는 약하다.
그리고 오나라 입장에서는 워낙 대군인 위나라의 군사가 버겁다.
적은 군사로 위나라의 군사를 대적하려면 화공을 펼쳐야한다.
그런데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겨울에 중국은 우리나라처럼 편서풍이 분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바람이 부는데 남쪽의 군사가 북쪽의 군사를 상대로 화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화공을 펼치려면 동남풍은 필수다.
오른쪽 위편에 설치된 칠성단의 깃발이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제갈공명은 재빠르게 미리 대기시켜 놓은 조자룡의 배를 타고 도망을 치고 언제 적이 될 지 모르는 사람을 살려 둘 수 없다고 판단한 주유의 명령을 받은 군사들이 제갈량을 잡으러 달려온다.
그 모습이 실감나고 재미있는데 나를 미소짓게 하는 또 다른 장치가 있다.
소설속 장면은 겨울인데 이 그림속에는 사방에 꽃들이 가득하다.
봄이다.
겨우내 불던 편서풍은 계절이 바뀌면서 동남풍으로 바뀐다.
전쟁의 긴장감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뭔가 해 볼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드는건 나만의 느낌일까?

적벽대전
적벽대전

赤壁大戰(적벽대전)
소설전체를 통털어서도 가장 치열한 전투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회자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판소리로 불리기도 한다.
이 전투에는 연환계라든가 노장 황개의 고육지계 그리고 동남풍 얘기까지 치밀한 작전과 첩보전 심리전등 전쟁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등장한다고 해도 될 것 같다.
멀미가 심한 위나라의 군대가 수전에 대비해 배를 쇠사슬로 묶는다.
황개는 항복을 가장해 위나라 군대까지 가까이 다가가고 화공이 시작되어도 묶여있는 배들은 도주 조차도 불가능하다.
아비규환이란 이럴 때 쓰는 표현인것 같다.
아래쪽 위나라 군사들과 대비된 오나라 장수 황개가 탄 작은 배와 소수의 군사들이 크고 당당하게 보인다.
구도도 재미있다.
부채꼴 모양의 호를 그리고 있는 위나라의 군대 한가운데 오나라의 배 한척이 화살처럼 혹은 칼날처럼 박혀있다.
아프다.
그 작은 배 선미에는 거짓 투항용 백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고 나중에 달았을 선봉황개(先峰黃蓋)라는 깃발이 허우적 거리며 도망치는 위나라 군사들을 굽어 보며 펄럭인다.
도망치는 군사들의 공포스런 얼굴들 속에 장수의 등에 업혀가는 조조도 보인다.
이런 세밀한 장치들이 채용신의 삼국지연의도 그림을 보는 재미를 더한다.
소설과는 달리 이 그림에는 오나라의 배가 달랑 한 척이다.
왜 그랬을까?

의석조조

義釋曺操(의석조조)
조조를 의롭게 놓아준다?
관우는 의리가 있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런 관우가 조조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다.
그런 사실과 관우의 인물됨을 잘 아는 공명은 조조가 적벽대전에 져서 도망갈 길을 미리 예상하여 장수들을 배치할 때 관우에게는 역할을 주지 않는다.
관우는 자기에게도 역할을 달라고 했다.
공명은 관우가 화용도에서 조조를 기다리게 했고 관우는 조조가 그 길로 오지 않을 거라 맞서 둘이 서로 잘못했을 때는 목숨을 내 놓기로 한다.
그런데 공명의 말대로 조조는 화용도로 왔고 관우를 맞닥뜨린다.
예상대로 관우는 조조를 살려주었지만 유비의 중재로 죽음을 면하게 된다.
말위에 올라탄 관우는 당당하게 빛나고 말위에 타고는 있지만 조조의 모습은 왜소하고 측은하다.

서성탄금
서성탄금

西城彈琴(서성탄금)
유비의 잘못으로 촉한의 군대는 위나라의 장수 사마의에게 쫒기고있다.
남아있는 군사도 얼마되지 않고 계속 도망을 가기도 여의치 않다.
쫒는 사람은 15만
도망가는 사람은 5천
애초에 게임이 안된다.
그런데 공명은 성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자신은 문루에 올라 거문고를 타고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 땀이 흘러내렸을 너무나 평화롭고 한가로와 보이는 모습
조선의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마당을 쓸고 있다.
소설에서는 군인들을 민간인으로 변복시켜 일상적인 활동을 하게 만든다.
평소 공명의 성격상 절대 무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사마의는 조심스럽다.
'벌써 원군이 도착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성을 등지고 퇴각한다.
그 유명한 공성계(空城計)이다.

단도부숙
단도부숙

單刀赴肅(단도부숙)
칼 한자루만 가지고 노숙에게 간다?
이 그림은 내용상 서성탄금보다 앞에 있어야 한다.
적벽대전에서 위나라는 대패했고 오나라는 승리했다.
하지만 전리품은 촉이 차지했다.
어이없고 억울한 오나라는 계속 촉나라에 형주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지만 이핑계 저핑계로 돌려주지 않는다.
아니 돌려줄 생각이 없다.
그래서 노숙은 관우를 회유하거나 안될경우 제거할 목적으로 잔치를 열고 관우를 초대한다.
노숙의 의중을 파악한 촉에서는 관우의 잔치 참여를 막고 싶어하지만 관우는 상대의 의도를 알면서도 몇명의 군사들만을 데리고 잔치에 가서 실컷 먹고 마시고 오히려 노숙을 인질삼아 안전하게 배를 타고 돌아 온다.
그림속의 노숙은 겁에 질려있고 관우의 표정은 여유가 있다.
그런데 채용신은 왜 이 그림을 마지막 그림으로 정했을까?

마지막 그림의 오른편 아래 배 위쪽의 그림만 찍어 보았다.
'임자년(1912년) 이른봄(맹춘상한) 전 정산군수 채용신이 그려 바친다(임자맹춘상한신전정선군수채용신사상)'고 되어 있다.
이 그림은 전주 관성묘(관왕묘 관제묘 모두 동의어임)에 걸려 있던 그림이라고 언급한 적 있다.
고종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당했고 일본은 1908년 관우사당에 제사지내는 걸 이미 금지시켰다.
그런데 1912년에 이 그림을 그렸고 그것도 개인의 의지나 취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원래는 도화서 화원들에 의해 그려지던 그림이었지만 도화서의 규모가 축소되고 유명무실해지자 선왕들의 어진은 물론 고종 자신의 어진도 채용신을 불러 그리게 하였다.
이미 국권을 빼앗긴 힘없는 나라의 더 힘없는 황제 그리고 그 황제의 명을 받은 이미 망국이된 조선의 신하는 이 그림을 왜 그렸을까?
어떤 염원을 담았을까?
그림들에서 처럼 비록 강한 힘은 없지만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해서라도 과거의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제국주의의 칼바람에 유린당한 조선의 백성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지혜로 싸워 이기고 또다시 독립된 조국에서의 삶을 꿈꾼 것은 아닐까?
그렇게 지혜롭게 최소한의 희생으로 싸워 이겨 관우처럼 우리민족이 그리고 우리 나라가 온전히 회복되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제2전시실
8점의 병풍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제1전시실의 그림들을 보고 이해를 한다면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무리가 없을거라 여겨진다.
입구에는 벽면에 보이는 병풍그림을 두었고 길상화 또는 고사인물화로 분류되어 있다.
좋은일이 생기길 바라는 길상화
그리고 옛이야기에 등장하거나 역사속의 뛰어난 인물을 그린 고사인물화
제1전시실의 그림이 관용 이라면 이 그림들은 민간인용이다.
자신의 아이들이 훌륭한 인물을 본받아 그런 인물로 자라나기를 바라는 소망도 담겼을 것 같고 또 저렇게 용감하고 힘세고 멋진 사람들을 가까이 두고 있다면 믿음직하고 든든하지 않을까?
아주 단순화되어 있지만 재미있고 해학적인 표현법과 병풍마다 다른 화법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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