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 강길봉
  • 승인 2019.10.13 02: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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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시간 길을 걸어오면서 종종 나에게 물어보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는 나는 무엇인가이다,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싶은 가이다. 학창시절 엄니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고 무작정 집을 나와 시골길을 걸어가다, 초가집 굴뚝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나고 식구들끼리 깔깔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땐, 커서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대학 대학원 시절에는 졸업해서 하루라도 빨리 돈을 많이 벌어서 제법 폼 나게 살고 싶었다. 고시학원과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삼십오 년 넘게 해 오던 일도 이제 끝나가는 요즈음, 수평선 저 너머로 고깃배가 가고 오는 것을 바라보며 어촌에서 한동안 살고 싶기도 하고, 10년 넘게 가꾸어온 텃밭에 사과나무도 심고 겨울엔 조그마한 비닐하우스를 지어 손녀가 좋아하는 딸기를 겨울 내내 먹게 해주고 싶고, ‘내 맘이 강물’ ‘그리운 금강산’ 같은 감미롭고 멋진 노래를 부르기 위해 성악을 얼마간 배우고 싶고, 때로는 조용한 산사(山寺)에 들어가서 혼자만이 시간을 갖고 싶기도 하다.
 또 다른 질문은 너에게서 나는 무엇인가이다. 우리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고 세상이 원하는 눈높이에 응대할 의무가 있다. 학교공부가 좋고 싫고 간에 묵묵히 수년간을 참고 견뎌야 한다. 교사나 교수, 사장과 사원, 목사 장로와 교인, 작가나 시인, 공무원과 시민 등 각자의 위치에서 무엇인가에 부응해서 살아가야 한다. 가정(家庭)에서도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몫이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은 찰나(刹那) 같은 인생에서 나는 무엇인가보다 너에게서 나는 무엇인가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나 싶다.

 이번 추석 이후, 아버지로서 나는 무엇인가에 생각이 머물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주 토요 시는 아버지를 제재(ground, 분석대상)한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아버지를 제재와 주제로 한 시는 박목월의 <가정>, 이어령의 <도끼 한 자루>, 손택수의 <아버지의 등을 밀며>, 이용악의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김현승의 <아버지의 마음> 등등이 있다.
특히 고등학교 교과서에 “가을에는 ....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무 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호올로 있게 하옵소서”라 했던 <가을의 기도>를 접한 적이 있다. 그런 친숙함의 연속선상에서 김현승(金顯承, 1913-1975, 전남 광주 출생)의 시집 <절대 고독>(1970) 중에서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아버지는 집을 사수(死守)하는 노역(勞役)을 거칠고 힘들어도 기꺼이 마다하지 않는다. 참새 같은 어린 자식들을 위해 무기를 만들고 감옥을 지키거나, 봇짐 장수를 하면서 바쁘게 어느 것 어느 곳 가리지 않고 일을 한다. 온갖 미혹(迷惑)으로 세상사가 시끄럽고 어지러울 때,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염려하고 고민하며 바람막이로서, 낙엽을 쓰는 정화자로서, 도둑이 들어올까 문단속을 하며 마음을 조린다. 작은 왕국에 '겁 많고 마음 따신 왕'으로서 물심양면으로 왕국인 집(home as a kingdom)을 사수하는 존재이다(제1/2/3/4연과 6연). 아버지는 세상이 원하는 너(가족)에게서 나는 무엇인가를 위해 기꺼이 자기 인생을 쓴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나는 무엇인가는 ‘애당초 없는 까마득히 잊혀진 진실’처럼. 그러다가 지치고 늙고 야위워가면서 아버지의 가슴에 쌓인 눈물이 낙엽처럼 술잔에 뚝뚝 떨어져 술잔의 술이 눈물로 흥건해 넘칠 질 때면(아버지가 마시는 술잔에는 눈물이 절반이다), 오랜 기간 노동으로 쇠잔(衰殘)해진 몸의 통증에 시름시름 앓게 되고 가을 황혼녘의 고독한 자화상을 맞이하게 된다. 술잔에 눈물이 떨어져도 아버지의 눈에는 웃음이 있다. 그래도 기꺼이 한 인생이 가정을 위해 다 저문다고 해도 자식들의 순수하고 올곧은 성장(너에게서 나는 무엇인가)로 그 모든 고뇌와 외로움(홀로 왔다 홀로 홀연히 떠나 사그라지는 본원적인 인생사의 애환) 또한 씻김 또는 세례(洗禮)된다는 게 아버지의 마음이다. 내가 아니라도 너(자식)의 아버지이니까 너를 위한 온갖 고뇌와 외로움도 너를 위한 것이라면 웃음을 머금을 수 있다는 게 아버지의 존재 의미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영국인들은 가정을 방어적인 뉘앙스가 강한 성(castle)이라고 하고 미국인들은 따스함이나 아늑함의 뉘앙스를 풍기는 집(home)이라는 용어를 쓴다고 들었다. 집이든 성이든 가정(family)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식으로 구성된다. 어머니로서 아내인 여성은 천성적으로 소통의 달인인가보다. 딸이나 아들이나 언제나 천성적인 소통쟁이인 엄마와의 대화는 막힘이 없다. 반면에 아버지는 별을 보면 달을 못보고 귀에 신경을 곤두세우면 눈은 없는 듯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외눈박이 같다. 아들과 아버지의 소통은 더욱 처절하다. 서로 알고 싶어도 상처 입힐까 상처받을까 염려스러워 ‘차마 풀어 재끼지 못할 보따리’ 같은 사이다. 아버지와 친구가 되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효(孝)다. 
 사실  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숭고하고도 엄숙한 과정이다.  신앙생활을 일상의 탄탄한 생활 궤적으로 체화시킨 (고)김현승 시인은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시를 통해 인간의 죗값을 예수의 숭고한 희생으로 씻김받듯이 모든 인간은 한 알의 밀알처럼 기꺼이 썩어 누구인가에게 의미가 됨으로써 그 가치가 더해지는 존재라고 설파하고 있다.
 가을바람처럼 아버지의 마음이 시원해지길 바란다.                                         


[강길봉 박사]

강길봉 박사
강길봉 박사

약력:
* 순천 태생, 순천매산고/단국대 법대(5.16 장학생)/고려대 대학원 졸(행정학석사/박사)
* 고시학원 강의(종로/노량진/신림동 24년)
* 고려대, 서울시립대, 행정안전부, 광운대 강의(외래/겸임/강의전담교수)
* 최신행정학(육서당,2000, 20판), 최신행정학(새롬, 15판) 행정학개론(21세기사,2019), 외 저서 및 논문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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