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연재]강박사의 토요 시(土曜 詩) 마음자리
  • 강길봉
  • 승인 2019.10.26 2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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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reminiscence)은 이미 지나간 시간 길에서 그립고 아쉬웠던 삶의 순간들을 다시 되돌아보고(look back), 기억(memory)하며, 상기(recall)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돌담에 어여쁜 돌멩이를 올려놓듯 시나브로 추억을 쌓으며 살아가고 있다. 아름다운 삶은 권력 돈 명예보다는 정겨운 추억을 얼마나 가졌는가에 달려있지 않을까. 추억은 그 사람만의 콘텐츠이고 역사이기 때문이다.

추억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특정한 사건과 관련되기도하지만 주로 인연(人緣)에서 이루어진다. 만남과 이별 속에서 애틋한 연정(戀情), 철도 겁도 없던 젊은 날의 우정, 가족관계, 은사와의 만남에서 추억의 날개 짓은 팔랑거린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연유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특정한 의미성을 갖지 못한 채 서로 주마등처럼 스치어 간다. 찰나적인 삶, 그 속에서 나 또한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 누군가의 눈짓에 들지 않는다면 나는 한 때나마 존재했어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소위 ‘유령’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추억은 서로의 유의미성(significance)을 자양분으로 영글어져간다.
추억의 자양분인 의미와 그 대칭인 무의미의 경계선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시인이 존재했었다.

“다뉴브 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 온 수 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 바닥에 쥐새끼보다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 생략 --------- ”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8)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김춘수(金春洙, 1922~2004) 시인의 시다.

이번 토요시에서 소개할 ‘꽃’은 1952년 <시와 시론>에 발표된 김춘수의 연작시 중 하나이다. 마산중학교 교사로 재직할 무렵, 밤늦게 교실에 남아 있다가 유리컵에 담긴 꽃을 보고 쓴 시라고 한다.

시 <꽃>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의미가)이 되고 싶다

인터넷 사진캡처
인터넷 사진캡처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 꽃은 나무나 집이나 전봇대, 어머니나 누나 등 우리가 눈으로 목도(目睹)할 수 있는 어떤 대상, 의미성을 도출해내는 도구이다.

또는 주관적인 해석과 이해의 단초(端初)다. 연애의 심상(心狀)은 아니라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간(世間)의 오해(誤解)에 힘입어 오래도록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어떤 사물이나 대상(꽃, 자연, 사람)이든 그 존재를 타자가 인식/인정하고 혼(魂)을 불어넣어줘야만(呼名,命名) 비로소 진정한 존재가 된다.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을 때에라야 사랑할만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존재로서 완성된다. 누구든 무엇이든 인간이 주관적으로 의식/인식/해석/이해하려는 정화(관심)과정을 거치지 아니하면 무의미한 몸짓에 불과하다. 꽃을 바라보는 의미 있는 마음의 에너지가 주입될 때 꽃은 생명체로서 완전하게 존재하게 된다.

제 1연과 제 2연을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

너/그(꽃) : ①그대(몸짓으로서의 꽃, 무의미와 부재) ->② 호명(관심/애정과
존중/감사)->③ 건강하고 풋풋한 생명체로서의 상대(대상) 존재의 완성

제 3연에서는 ‘홀로 부르는 사랑’노래는 벽에 부딪히면 산산조각이 나고 급기야 무의미해지며 존재에서 멀어진다. 하나의 존재와 의미는 그것을 떠받쳐줄 수 있는 또 다른 받침대가 필요하다. 나의 인식 대상인 너와 사물은 물론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인 나 자신도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김소월의 <초혼(招魂)>처럼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 되기 때문이다. 너처럼 나도 너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고 그래야만 너와 내가 균형 있는 상생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 3연을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

나: ① 나(꽃; 무의미와 존재 불모지) ->② 너의 호명(나도 꽃이라고 불러줌)
->③ 나의 빛깔과 향기를 지닌 나(주체)의 존재완성

자아(주체)의식이 자리 잡은 이십대 중후반 이후 시인이 겪은 현실은 일제의 조선인 도륙(屠戮,massacre), 일본 천황/총독 비판죄로 반년 넘은 기간의 유치장 생활, 일본대학의 강제퇴학조치, 제2차 세계대전, 6.25 전쟁으로 동족끼리 서로 총을 겨누는 비참함 등이다.

역사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과 허무감으로 ‘눈에 보이는 세상’보다 그 이면(裏面)인 눈에 안 보이는 내면(의미와 존재) 공간으로 다시 침잠했다. 이것은 너(You)와 나(I)의 내면의 합창(合唱)으로의 상생은 이루어지는 피난처(shelter)이다.

그러나 너와 내가 안온하게 숨 쉬는 돗단배가 거센 풍랑을 견딜 수는 없듯, 그들(They, 허무와 잔인함 가득찬 암담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We)의 유의미한 터전’(우리 모두 무엇인가 되고 싶다. 잊혀지지 않는 눈짓)이 있어야 한다.

시인은 비장하게 이야기한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의미 있는 마음이 터전(보금자리)이 되자고. 더 나아가서 너와 내가 존재의 의미를 보다 단단하게 만끽할 수 있는 우리라는 공간, 즉 감사와 애정 넘치는 사랑의 공간이든, 아니면 서로서로를 위무해주는 정치사회적 공동체이든, 그것이 마련 되어야 우리 모두는 진정 존재할 수 있는 거라고.

제1-4연까지를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

제 4연: * 너와 나의 존재 터전 ->공감과 호명->눈짓(우리의 존재와 의미 터전)
* 무의미와 부재(몸짓) -> 너와 나의 의미와 존재 ⇆우리의 의미와 존재(눈짓)

추억의 꽃(flower to your memory)이란 삶의 시간 길에서 세간의 분에 넘치는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시기의 벅찬 감정이라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시간 길에서 다소의 시간차는 있어도 한두번 그러한 경험과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로부터 존재의 의미성을 부여받았다면(사랑고백, 우수상장, 높은 지위나 권력, 명예, 연에인들의 큰 인기, 탁월한 연구업적 등) 그 다음엔 반드시 그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天刑 같은 의무다.

간혹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부러움을 받았던 연예인이나 정치인 문인들이 하늘도 용서하지 않는 짓(자살,suicide)을 감행한다.

내면의 충격이 아무리 크다해도 추억의 꽃을 생각하며, 누군가의 호명(너의 존재와 의미 인정, 너의 시들지 않는 꽃)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살만하지 않는가. 누군가의 호명을 받았다면 그의 영혼이 내게 다가온 것이고 자기 혼의 반쪽이 타자의 몫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삶이 남루하거나 가슴 아플 때, 추억의 꽃을 품으며 부비며 남아있는 시간길을 삼쾌(상쾌유쾌통쾌)하게 갈어가시길 바랍니다.


2019.10.26.5:42 강길봉 드림


[강길봉 박사]

강길봉 박사
강길봉 박사

약력:
* 순천 태생, 순천매산고/단국대 법대(5.16 장학생)/고려대 대학원 졸(행정학석사/박사)
* 고시학원 강의(종로/노량진/신림동 24년)
* 고려대, 서울시립대, 행정안전부, 광운대 강의(외래/겸임/강의전담교수)
* 최신행정학(육서당,2000, 20판), 최신행정학(새롬, 15판) 행정학개론(21세기사,2019), 외 저서 및 논문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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