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구, 30일 용산위수감옥 학술심포지엄
용산구, 30일 용산위수감옥 학술심포지엄
  • 장은영 기자
  • 승인 2021.10.27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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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일 오전10시~오후6시…용산문화원 3층 대강당서
- 용산위수감옥 역사·활용 방안 논의
- 용산문화원 유튜브로 실시간 생중계
용산위수감옥 학술심포지엄 홍보 포스터
용산위수감옥 학술심포지엄 홍보 포스터

의병장 강기동, 장군의 아들 김두한, 박헌영의 비서 박시현, 남로당 조직책 이중업...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바로 일본군이 만든 ‘용산위수감옥’을 거쳐 갔단 사실이다. 시대마다 이름은 달랐다. 위수감옥, 미 제7사단 구금소, 육군형무소 그리고 해당 건물은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용산 미군기지에 자리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구청장 성장현) 용산문화원이 30일 오전10시부터 오후6시까지 ‘용산위수감옥(이하 위수감옥)의 역사를 찾아서’ 학술심포지엄을 연다.

행사 장소는 용산문화원 3층 대강당이며 코로나19 상황을 감안, 참석인원을 제한하고 용산문화원 유튜브로 실시간 생중계한다.

발표 주제(발표자)는 ▲일제강점기 용산위수감옥의 역사(황선익 국민대 교수,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 ▲미군정기 대한민청사건과 용산위수감옥(서준석 서울역사편찬원 연구원) ▲숙군과 용산위수감옥(노영기 조선대 교수) ▲한국전쟁 전후 용산위수감옥의 역사(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용산위수감옥의 활용 방안(서건혁 아키헤리스 대표) 등 5개다.

토론자로는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 한봉석 이화여대 이화사학 연구교수, 이신철 역사디자인연구소장, 최호진 지음건축도시연구소장, 최희수 상명대 교수, 엄진희 구 역사문화해설사가 함께한다.

좌장은 신주백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이 맡았다.

위수감옥은 군령을 어긴 일본군인, 군속들을 가두기 위해 한국주차군(조선 주둔 일본군)이 용산기지 내 건설했던 군 시설이다. 러일전쟁(1904~1905) 중에 구상된 일제 영구병영 구축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과 함께 본격화됐으며 용산 병영에는 군사령부, 보병막사, 위수감옥 등이 들어섰다.

특히 위수감옥은 준공(1909.7.24.) 후 112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건물 일부가 용산 미군기지에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황선익 교수, 김천수 실장은 일본군 군령에 따른 위수감옥 설치·운영 과정을 소개한다. 위수감옥은 384평 규모로 붉은 벽돌 담장에 둘러싸인 구조였다. 청사, 감방, 기타 부속건물로 구성됐으며 동남쪽에 감문(정문), 북서쪽에 비상문(시구문으로 추정)을 설치했다.

흥미로운 점은 1911년 3월 의병장 강기동(1884~1911)이 이곳에 수감돼 군법회의(군사재판)에 회부됐다는 사실이다. 같은 해 4월 17일 그는 용산육군사격장에서 총살당한다. 4월 19일자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서준석 연구원은 대한민주청년동맹(대한민청) 사건으로 위수감옥(당시는 ‘미 제7사단 구금소’)에 수감된 김두한(1918~1972)에 주목한다. 대한민청 사건은 1947년 4월 20일 대한민청 감찰부장 김두한이 사람들을 이끌고 그의 오랜 친구이자 좌익청년단체에서 활동했던 정진룡 등을 납치, 구타, 살해한 사건이다.

김두한은 미군이 주재하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1948.2.12.)받고 용산 미군기지 내 군사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판결 최종 결재자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1948.5.17.),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에 의해 사면(1948.10.6.)된다.

김두한 회고에 따르면 당시 미 제7사단 구금소에는 ‘장덕수 피살사건(1947년 12월 2일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가 제기동 자택에서 한국독립당 소속 독립운동가들에게 총격을 받은 사건)’ 피의자들도 수감돼 있었다고 한다. 서준석 연구원은 김천수 실장과 함께 관련 문건(1948.4.21.자 미군정재판 군사위원회 명령 4번)을 발굴, 이를 최초로 확증했다.

미 제7사단 구금소는 1949년 1월 13일 ‘주한미군형무소’로 승격됐으며 주한미군 철수(1949년 6월) 후 대한민국 ‘육군형무소’로 바뀐다. 당시 대대적으로 이뤄진 군 내 좌익 척결(숙군) 과정에서 대부분의 피의자들이 이곳에 수감된 것으로 보인다.

노영기 교수는 “이 시기 특징 중 하나는 민간인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육군형무소에 수감시켰다는 점”이라며 “김태준, 유진오 등 빨치산 출신과 이용운(1949년8월 김호익 총경 암살사건 주범) 등 민간인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됐다”고 설명했다.

이 외 1949년 6월 ‘국회 프락치(공작원) 사건’으로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박헌영의 비서 박시현, 연락책 정재한 등 7명이 육군형무소에 수감됐다. 또 같은 시기 남로당 조직책 이중업이 여기서 탈옥(1949.7.17.)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갑생 연구원은 한국전쟁 전후 위수감옥 역사를 살핀다. 특히 한국전쟁 시기 미군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위수감옥(육군형무소) 건물은 1953년 7월~1963년 ‘미8군 구금소’로 활용된 것으로 보이며 이를 확정하기 위해 추가 연구가 필요하단 결론이다.

구는 다음달 위수감옥 연구자료를 묶어 책자로도 발간한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용산위수감옥은 일제강점기, 해방전후, 미군 주둔기 역사를 한 번에 살필 수 있는 매우 의미 깊은 장소”라며 “한국근현대사의 축도인 용산기지 역사를 중앙정부가 아닌 지자체가 나서서 이렇게 심도 있게 연구하는 사례는 전국에서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학술연구를 통해 많은 시민들이 이곳에 묻힌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바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용산국가공원의 조성 또한 역사성과 장소성을 바탕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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